○… 교단은 이제 반백년 결실기를 넘어서서 결복기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이는 교단의 발전함에 따라 교단 기구가 늘어났고, 교역자도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교단이 커지고, 기구가 팽창함에 따라 초기의 근본정신이 흐려질 수도 있고, 또한 근본정신에 대한 해석상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세대의 차이가 있는 출가교역자 2명과 재가 1명이 함께 모여 정담을 나누었다. <편집자 주>…○
참석자
서대인 <감찰원장>
이광정 <원광사 사장>
박정원 <원광대 교수>
때: 5월 29일
곳: 감찰원 회의실
<사진설명: 서대인 이광정 박정원>
<사진설명: 중앙총부 송대에 세워져 있는 대종사 성비>
병든 사회를 향도해야 할 교법의 사회화는 시급한 과제
문자 해석에만 급급 하는 이소성대 정신구현은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근본정신의 합리적인 이론전개는 자기 껍질 쓸 위험 커
교단초기의 전무출신 생활신조는 「불고(不顧)가사(家事)」
「오롯」이라는 의미 상황 따라 폭넓게 해석해야
교단 내의 대화 단절은 경직성 유발 요인
역사의식 바탕 없는 교정 집행은 죄인
초기교단의 전무출신 생활 자세는 문자 그대로 불고가사(不顧家事)하였었다. 당시 선진들은 3년 동안 가정을 잊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고 무려 8년 토록 집을 돌보지 않는 예도 있었다.
이처럼 불고가사는 초기 원로들의 교단생활 신조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현대 사회 양상으로서는 여러 면에서 시대 차이를 빚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것은 공· 사 간의 조화와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청이 그 첫째 이유이겠다. 말하자면 교단생활에만 전념하다 보면 가정을 외면하게 되는 결과를 빚는 것은 결코 소망스러운 것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대의 추이에 따라 선진의 생활신조를 현실에 맞게 수기응변하는 묘리를 터득해야 한다는 요청도 낳게 되는 것이다.
<오롯>이라는 의미
따라서 교단에 오롯하게 바친다는 것만이 「전무출신」이라는 어의의 총체적인 해석이어서는 안 되며, 가령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결과 빚어지는 가정 파탄의 곤경은 곧 이것이 하나의 사회문제로 대두된다는 점을 외면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정신의 터전 위에 시대상황을 감안하는 지혜의 요구란 초기 선진들이 발취하였던 예지, 말하자면 병든 사회를 재로의 방향에서 향도하였던 역량을 개발하고 이, 시대에 다시 불 붙여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와 관련시켜서 오늘의 교단 현실을 관찰하여 보면 시대를 향도하기는커녕 추종하는 데도 바쁜 걸음질인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교전을 펴들면 구구절절마다 병든 사회를 치료하기 위한 사회개혁의 의지가 엿보이는 점에 감명하곤 한다. 그런데도 이런 감명이 오늘의 사회현실에 투사되어 사회화 되지 않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근본정신의 사회화
모름지기 종교란 개개인을 전리적으로 변화시켜 그런 개인들이 처한 사회를 진리적인 사회가 되게 이끄는 노력과 운동을 전개하는 집단이라고 본다면, 원불교의 경우 교전 곳곳에서 보이는 시대의 향도력, 이른바 사회 개혁의 역량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 이를 테면 비인간화(im-person)의 문제라거나 공해, 자연과 인간의 조화 등 잡다한 문제해결을 향도하여야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사회문제 해결의 열쇠는커녕 그런 문제에 쏟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실정임에랴-.
개혁정신의 계승
또한 개혁을 시도하려는 과감한 의지가 약한 것으로 진단되는 오늘의 현실은 급기야 교단의 경직성을 치료할 처방책을 찾는데 급급한 교단 현실이 되었다면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겠다.
계문의 현실적인 해석에 있어서도 상당한 시대적 괴리감을 느낄 것으로 보아지는데 <사회개혁>이라는 차원에서 음미하여 볼 때 대종사님의 뜻을 역사와 더불어서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저 단순히 박물관적 유물(?)로 자랑만 일삼는 정도에서 머무는 실정에 있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단적인 예로 초기 <상조조합> 운동의 경우를 보자. 초기에는 이 조합운동이 크게 융성하여 지방교당을 지원해주는 실례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30~ 4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실정인가?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교조 정신의 현대적 조명
우리는 대종사님의 펴신 뜻을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계문 해석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분의 뜻이 손상되지 않게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고 또 그 의미가 시대성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을 믿고 따르는 자세만이 요구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육을 먹지 말라는 조항을 실천할 경우에도 이러한 조항이 내포하고 이는 본 뜻, 즉 생명에 대한 경외심- 함부로 살생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포악해지고 생명 가진 것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정신이 마멸될 것을 경계한 점 등을 간파하는 데 오히려 주력해야 할지언정 약간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고 조금은 비합리적이라는 단면만을 가지고 일축해 버리는 어리석음은 금물인 줄로 믿어진다. 오히려 종교 신앙의 자세는 경전을 음미하고 또 음미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데서 만이 신앙생활의 진미가 있을 것이다.
계문은 믿고 따름이 첩경
그런데 대개의 경우 현대인들은 계문이란 우리 인간 생활을 구속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십상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구속스러운 올가미이기 보다는 우리 인간성품을 폭넓게 길러 가도록 제시한 지침으로 이해한다면 계문이 주는 위화감이라거나 구속감에서 탈피될 수 있는 것이다.
끽연, 음주 조항도 그것들이 지나쳐서 오는 폐해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쓴 듯하다. 그렇다고 피우고 마시는 것들이 능사임은 더더구나 아니다.
낯선 사람과의 초대면의 경우 음주가 대화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분위기 조성을 한다는 공과를 도외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나치는 데서 오는 수신의 도리에 엇나감을 없애자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수기응변의 능력이 없는 초입자는 차라리 수신요법의 철칙으로 믿고 지키는 데 힘쓸 일인 것이다.
문자에 얽매인 이소성대 정신
교단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하여 보자. 아마 대종사님께서 직접 돈 벌기에만 발 벗고 나섰다면 교단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으리라고 믿어진다. 이를 테면 창립 정신의 근간으로 이소성대 정신을 제시하면서도 1차 대전 말기에는 <숯장사>를 단행하는 적절한 모험도 불사하는 면을 보였는데 현재의 교단은 기업화를 위한 모험 정신의 결여를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하여 본다. 그런데 현실은 이소성대 정신을 너무 문자에 얽매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이소성대 정신은 합리적인 토대 위에 적절한 모험을 구사하는 가운데 기업화를 도모할 수 있는 경영 수완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소성대와 같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과감한 현실 참여에서 적극적인 자립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자세에서 너무 안이하게 사업을 이끌어 오지는 않았는가 자성해야 할 것이다.
12주년 주기의 사업한도 계획
따라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앞으로 도래할 미래사회에 적절한 설계를 세워 사업이며 교정 전반에 관한 업무를 추진할 것이 요구된다. 물론 이와 같은 추진력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 능력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미래학자들은 모두 성현들임이 분명하겠지만, 앞으로 도래할 세계에 대한 대비 없이는 교정이나 또는 일반 행정론도 무용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종사님은 일찍이 장단기 사업 계획을 12년 주기로 설정, 미래 사회에 대처할 종합적인 설계를 세웠던 것으로 본다.
커뮤니케이션 단절의 극복
이 시점에서 교단이 안고 있는 문제란 요컨대 적재적소에 맞는 인물빈곤도 말할 수 있는 반면 그에 앞서 교단의 각계각층에서 백출하는 좋은 착상을 교단의 제도적인 장치를 통하여 개진되어야겠고 이러한 착상들이 공염불로 끝나지 않게 수합하는 기구의 필요성이 시급한 것이다. 또 세대 간의 커뮤니케이션 갭은 조직체의 경직성을 유발하는 요인이라는 점을 외면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초기 교단은 구성원이 적었기 때문에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직접 전수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교단이 확장되고 전무출신의 수도 많다 보니 과거처럼 원활한 의사소통을 기대하기란 요원한 것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체널을 공식적인 기구로 제도화 할 필요성을 느낀다.
<공중사>라는 미명의 책임 회피
특히 문제로 지적될 것은 <공중사를 단독 처리하지 말며>라는 조항이 자칫 책임 소재 불명이나 또는 책임을 져야 할 당무자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합리적인 도구(?)로 전락(?)할 우려도 많다는 점이다.
교정실책은 역사적 죄인
따라서 교정 집행과정에 있어서 대소사를 막론하고 공중사라는 미명의 주인 의식의 결핍(?)도 크게 문제 삼아야 할 일이다. 반면 지나친 주인의식이 오히려 비등하는 참신한 착상을 외면하는, 이른바 성급한 사업성취 욕구의 급격한 상승세(?)로 인하여 졸속 행정을 면치 못하는 따위도 크게 경계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교단의 고급 정책 입안 과정에 참여하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참여의 기회를 잃은 계층들의 교정에 대한 무관심을 배제하기 위하여 교정 집행자들은 각별한 배려를 가져야겠다.
어느 면에서 보면 법치교단을 주창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교단의 전도에 암운은 없을까? 또는 정도를 걷는가? 하는 문제들은 오히려 교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재야의 식견이 객관성과 바른 안목이 높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집행 업무와는 직접 관련 없이 적절한 거리를 두고 관망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같은 비참여증의 교단 행정에 대한 무관심은 설령 어떠한 교단 행정의 실책이 발생하였을 경우 직접 책임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이 면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크게 위험한 생각이다. 그 이유는 사실 교단이라고 하는 공동운명의 배에 편승한 승객으로서 오늘의 실책이 훗날 역사적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참여 세대이든 비참여 세대이든 오늘을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크게 역사 앞에 단죄되어야 할 세대적 공범자임을 깊이깊이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단 각계에 산적한 문제의 해결 바탕은 우선 근본정신의 재발견과 그것을 현실성 있게 발전시켜 가는데 모두의 의견이 집합되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교단일 것이다.
<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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