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而不空하고 有而非有라
텅 비었으나 공이 아니요 있으나 있는 것이 아니로다.



진공실체가 비었으나 빈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공 가운데 모든 조화가 갈마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있으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만일 있는 것에만 치우친다면 현실을 초월할 수가 없게 된다.
大砲無外하고 細入無內하며
크기로는 밖이 없는 데까지 포함하고 작기로는 속이 없는 데까지 들어가며-
우리는 언뜻 자기 세계만을 구축하기에 분주하지 말고 나를 벗어난 큰 세계를 건설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속이 없는 데까지 침투해 들어갈 만한 역량을 길러야 한다.
가령 우리가 분별을 낼 때는 우주 대자연을 마셔 버릴 경륜과 포부를 가져야 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에는 조그마한 일에도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
천하를 내 세계 삼으나 조신에는 털끝 만한 것도 조리강령에 어긋남이 없어야 할 것인즉 이를 참대장부라 할 것이다.
神通智慧와 光明壽量과 大機大用이 無盡無窮하나니 有志之士는 宜善參究하야 以大悟爲則하면 하地一聲後에 許多靈妙皆自具足하리니
신통지혜와 광명수량과 대기대용이 다하고 다 함이 없나니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참구를 잘 해서 크게 깨치기 가지 공부하면 홀연히 깨치는 한 소리에 내 마음의 진리광명이 스스로 다 갖추어 있으리니-
신통지혜란 사리에 막힘이 없는 지혜를 이름이요, 대자연의 진리를 요리해서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할 수 있는 지혜를 뜻한다.
광명수량이란 진리의 광명은 불생불멸하여 그 수명이 한량이 없다는 것이요, 이 대기대용이란 분별을 떠난 자성의 혜광을 통하여 사리를 건설하는 것이다.
선의 세계를 터득하게 되면 이러한 신통지혜와 광명수량과 대기대용의 진여묘체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뜻있는 자는 마땅히 자력과 타력을 병진하여 정진에 정진을 거듭할 것이니 그런다면 나도 모르는 가운데 홀연히 내 마음속에 진리의 광명이 갖추어져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豈同邪魔外道 以傳授로 爲師佐하고 以有所得으로 爲究竟自哉아
어찌 사마외도의 전해 주고받는 것으로써 스승이니 제자니 하며, 얻는 것만으로써 구경자리를 삼을 것인가.
본래는 알 것도 없고 깨쳐 얻을 것도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9년간 설법을 하시고도 마지막엔 한 법도 설할 바가 없노라고 하셨다.
만일 한 법을 얻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마외도에 불과하다. 참으로 견성한 사람은 견성했다고 않는 것이며 따라서 주고받을 것도 없다. 일체개공인 것이다.
불교의 진리가 이러할진대 어찌 꼭 얻는 것이 있는 것으로만 구경자리를 삼을 수 있겠는가.
얻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고, 매한 것도 없는 그 자리에 안주해서 천만분별을 여실히 낼만한 일을 하는 것이지 특별히 나는 무얼 얻어야겠다 하는 관념을 애당초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좌선은 특별한 처소와 시간을 정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시방삼계를 선방으로 삼아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찢어짐>의 근본 마음자리를 알아서 마음의 광명을 노출시키고  <찢어짐>된 광명을 가지고 이 세계  <찢어짐> 운전해 가는 것이 참다운  <찢어짐>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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