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홀로 여여히 있으니

깨치신 진리를 ○으로 상징하시고 일원상이라 이름 하신 일원상의 참된 뜻 참된 이치 또는 그의 본질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밝히신 법문이 이 「일원상의 진리」인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 하나가 지리 아님이 없다. 그런가 하면 그 진리의 참 모습을 꿰뚫어 보지를 못하고 그릇되게 분석하고 판단하기에 진리 아닌 거짓을 진리로 오인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진리로서의 어떠한 카테고리(범주)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일원상의 진리에서 밝히신 바는 바로 일원상 진리의 범주라고 생각하여 분석해 본다.
진리는 고금을 통하여 다름이 없고 시방을 두루 해도 다함이 없다 하셨다. 그러므로 진리는 우주만유의 본원이어야 한다. 만유가 다 각각 생성을 얻고 또한 변화해가면 존재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이 진리에 근원하여 생성하며 변화하고 존재한다. 그러기에 진리인 절대자는 유일자인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이 진리의 실체를 이 진리의 실체를 우주자연의 질서 밑에 서로 관계지어있는 천지와 부모와 동포와 법률로서 대별하였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실체적으로 대별하면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천지만물 허공법계라 갈파하시었다. 그러기에 일원상의 진리는 바로 천지의 근원자리요 부모의 근원자리며 동포의 근원자리요 법률의 근원자리인 것이다. 만유 가운데의 「나」의 생성은 천지 부모 동포 법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나의 생성의 근원이 사은이라면 사은의 근원은 곧 일원상의 진리로서 만유가 이 하나에 근원했고 만유의 생성이 이 하나의 진리에 통어되었고 섭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원상의 진리는 본원적으로 하나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진리는 진리로서 독존해 있는 것이 나리라 사실에 바탕 하여 만유에 두루 편재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는 하나이면서 만유 그대로이어야 한다. 우주 자연의 운행이나 그에 따른 꽃은 붉어지고 버들도 푸르러지는 자연의 변화 또한 진리의 나타남이 아닐 수 없는 것처럼 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모든 차별 현상이 또한 진리의 섭리 아님이 없다 할 것이다. 더욱이 만유 가운데 자각적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진리의 지혜 덕상(德相)을 다 풍부히 갖추고 있다고 하시었다. 그 증거로서 깨치신 제중제성과 깨치지 못한 범부중생의 차별은 오직 이 미오(迷悟)의 차이 뿐으로서 진리의 지혜 덕상을 깨치면 불성이요 깨치지 못하면 범부중생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진리에 귀의하여 그를 표본으로 하며, 닦고 길러서 진리에 계합하고 진리를 활용할 수 있는 수행자로서 종교인으로서의 신행(信行)을 교시해주신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는 만유 그대로 진리의 현현(顯現)이요, 법신불의 응화신인 것이다. 하나이면서 만유 그대로이어야 한다. 일원상의 본래적 체성이 이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이면서 만유인 것이라면 또한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돌아가니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없는 것은 있는 것으로 돌아가니 없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독존해 있으니 그를 무엇이라 할 것인가. 저 당나라 고승 회양선사의 말과도 같이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또한 맞지 않다(설사일물(設使一物) 즉 부중(不中))는 그 소식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일원상의 진리는 말과 글로써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있다 하면 없는 것이 상대가 이루고 크다 하면 작은 것이 상대를 이루고 희다 하면 검은 것이 상대가 이루어지니, 언어와 명상으로써 가르칠 수 없는 자리이다. 저 옛 선사가 이른 삼세 모든 부처들이 입을 떼어 벽에 붙여놓았더라(삼세제불 구괘벽상(口掛壁上))함이 바로 그런 소식인가 싶다. 그러나 그 자리는 생멸도 없고 거래도 없어서 영원하여 변함이 없는 여여한 자리인 것이다. 만유가 생래의 처음이 없고 그러기에 또한 멸하여 없어지는 종말이 없으며, 수억 만겁 전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또한 미래 수억 만겁 후에도 여여자연 할 것이 아닌가라고 갈파하시었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신 본래 구유하여 증감이 없는 본래 그대로 갖추어 있는 자리며, 본자원성(本自圓成)하여 새로운 창조나 또한 종말 같은 논리는 부칠 수 없는 원만구족하게 성취되어 있는 자리라고 보신 것이다. 여기에 본교의 우주관 또는 세계관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총부 순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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