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의 신앙 ①
신앙이란 생활이요 체험이지
계교 사량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일원상의 신앙이란 지금까지의 개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하나는 절대 진리에 대한 귀의요 다른 하나는 언어명상이 끊어진 절대 진리에 대한 각증이다.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개념이라면 자연 질서위에 초자연 질서가 임하게 됨을 경건하고 솔직하게 믿고 그에 귀의하여 감응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신앙이란 생활이며 체험이지 학문과 지식이 아니요 사랑하고 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구하고 감응을 얻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절대 진리를 감히 언설로써 알고 알릴 수 없는 경지라면 그 자리는 신앙을 통해 스스로 각증을 얻는 보다 궁극적인 체득이라 할 것이다. 전자를 타력신앙이라 한다면 후자는 자력신앙이라 할 것이니, 본교의 자· 타력 병진의 신앙이 바로 이를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앞에 일원상의 진리에서 그의 본질을 설명하고, 일원상의 신앙에서는 그의 본질 그대로 일원상의 진리를 믿는 것이라 설(說)한 것이다.
먼저 일원상의 진리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절대의 하나이나 그 하나임을 믿으라. 만유가 여기에 근원하고 생성하며 변화하고 있으니 이 자리야말로 가장 크고 높고 거룩하며 영원하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귀의하여 감응을 얻고 이 자리를 각증하여야 비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요 따라서 제도를 받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만유 모두가 다 부처이다. 깨친 불보살이나 미한 중생도 다 함께 부처의 지혜 덕상을 갖추고 있어서 죄복고락의 차별 현상이 이 자리에서 전개되나니 일원상의 진리가 바로 그러한 자리임을 믿으라. 이 자리야 말로 소소영령하고 매하지 아니해서 싱그럽고 슬기로워 속일 수 없는 자리이니 여기에 귀의하여 감응을 얻고 이 자리를 각증하여 인과에 매하지 아니하며 비로소 영원한 세상에 죄복고락을 임의 자재하는 여의보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는 본래 고정되어 어떠한 한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이나 한 글자가 한 명상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 진공한 무(無)인 자리다. 크다 하면 작음이 상대되고 영원하다 하면 단촉한 것이 상대 지워지고, 생에는 사가, 고에는 낙이, 죄에는 복이, 각각 상대 지워지고, 없다고 있어지고, 있다면 없어지니,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고 그러기에 생사 이전 고락 이전 유무 이전의 절대 무(無)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형상과 언설로 나투어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허망 무상한 것이요 오직 이 절대부한 이 진리만이 독존할 따름이니 이 자리를 믿어 귀의하여 감응을 얻고 이 자리를 믿어 각증하여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아 생사에 해탈을 얻고 죄복고락이 본래 없는 진리를 깨쳐 죄복고락에 해탈을 얻을 것이며, 형상 있는 모든 것들이 본래 없는 진리를 깨달아 형상 있는 재색명리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초탈하도록 하였다. 또 이 일원상의 진리는 만유 모두 그대로라고 하였듯이 진리가 진리로서 나툴 수 있다면 오직 만유에 바탕 하여 존재하고 생성하며 변화해 갈 때 우주와 인생과 만유가 각각 생성 변화하여 무량세계가 전개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야말로 우주와 만유가 본래 구족해 있었으며 본래 스스로 원성해 있었던 것이니 이를 믿어 신령스런 감응을 얻고 이를 각증하여 우주와 만유를 받들고 섬기어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 그리하여 만능의 힘을 얻어 세계가 인류를 위해 선용하고 활용하도록 하였다. 끝으로 이 일원상의 진리가 바로 공적영지의 광명이요 진공묘유의 조화임을 믿으라 하였다.
일원상 진리의 본질이 하나이며 모두 요 한 물건도 없으면서 똑똑히 있게 하는 그 소리를 공적영지의 광명이라 하였다. 무엇이라 표현하더라도 맞지 않은 것이라면 교화의 방편을 위하여 감히 공적한 가운데 영명하여 매함이 없는 지혜의 광명이라 설시하시었으니 이가 곧 진리의 내적 본질의 약칭이라고 해 봄 직 하다.
그러나 이 진리가 우주와 만유에 나툴 때 존재하고 생성하고 변화하여 무량세계가 전개해 있는 모습을 또 감이 진공묘유의 조화라 하였다.
<총부 순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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