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교당

 순창교당이 법당을 신축, 면모가 새로워졌다. 원기28년 관촌교당 이지일 교무가 권일경씨(현재 담양 순교)의 주선으로 출장법회를 시작하면서 순창에 일원의 법음이 전해졌다. 이교무의 외가였던 순창면 가잠리 차지은씨 집 방 한 칸을 빌려 법회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교통이 불편했던 관계로 관촌에서 백여리 길을 이교무는 걸어서 혹은 군용트럭을 타고 다녀야 했으나 한 달에 두 번씩 가지는 출장법회를 거르는 일은 없었다. 6 ㆍ 25동란으로 1년간 쉬었다가 이듬해 교도들을 다시 규합, 집 한 채도 마련치 못한 채 교도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법회를 보아왔다. 원기39년 초대 권우연 교무가 부임하였으나 교당운영은 막연하기만 했다. 원기49년 봄, 교당발전상 교당을 읍내로 옮겨야 된다는 의견에 따라 최도정씨와 교도들의 추선으로 순창읍내에 전셋집 한 칸을 얻어 교당을 읍내로 옮기게 되었다. 교당을 읍내로 옮기고 벅찬 희망에 부풀었던 순창교도들은 또 한 번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종교에 이해가 부족한 집 주인이 시끄럽고 번잡하다는 이유로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해온 것이다. 순창교도들은 실망에 앞서 법당을 우리의 힘으로 마련하자는 권순교의 열의에 감동, 임효순, 선정모씨 등이 교당신축에 앞장섰고 교도들의 합력으로 그해 11월 초가 3칸을 마련하게 됐다. 비록 작은 집이었지만 내 집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련했다는 보람 속에 순창교당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당시 어려운 교당살림을 알뜰히 보살펴온 권정훈씨와 가사를 불고하고 순교활동의 주역을 맡았던 최도정씨의 노력이 순창교당 중흥의 초석이 되었다. 교도가 하나 둘 늘어가고 교당의 운영이 원활해짐에 따라 예회 날이면 법당이 비좁게 되어 법당 신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교당 신축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을 때 임성린씨가 법당신축을 자담하고 나섰다. 원기42년 임태화씨 연원으로 입교한 임성린씨는 노길용 건축사장이 개인주택을 지어준다는 것을 교당신축으로 돌린 것이다. 원기42년에 공사를 시작, 그 이듬해 봄에 법당이 준공되었고 초가는 매도하여 교당 옆 와가 1동을 매입하여 식당채로 사용하는 한편 교당주위 담장공사는 물론 범종까지 마련, 교당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원기45년 2대 김봉식 교무가 부임하면서 교도들의 교리공부와 교화벌전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고 이어 양혜연, 김지영 교무가 다녀갔다. 최규학 교무가 순창에 부임한 것은 원기 56년. 법당신축의 무거운 짐을 안고 부임하게 된 것이다. 원기 42년에 신축한 법당은 건물이 허술하기도 하려니와 예회 날이면 교도들이 다 들어가 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도들의 한결같은 염원인 법당신축은 시급함을 느끼면서도 자금이 마련되지 못하고 보니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김지영 교무 재임 시 강덕정 지부장의 희사금과 몇몇 교도들의 협조로 교당 옆 대지 1백36평을 교당부지로 마련한 것이 교당신축에 큰 도움이 됐다. 건축기금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채 원기58년 9월 역사적인 법당 신축 기공식을 가졌다. 강덕정 지부장의 1백50만원 희사와 한남순, 서혜인씨 등 몇몇 교도들의 성금과 노력동원으로 59년 5월 3일 봉불 낙성식을 갖게 된 것이다. 건평 42평, 총 공사비는 2백70만원. 『오랜 숙원이던 교당이 마련되었으니 정기훈련을 통한 교도들의 교리연마에 노력할 생각』이라고 말하는 최규학 교무는 『관심을 가지고 정성과 노력을 다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말한다. 6 ㆍ 25의 포화 속에서도 꺼질 줄 모르던 한결같은 신성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순창 교도들은 교도들의 정기훈련, 청년 ㆍ 학생회 결성 등 부푼 희망에 차있다. <悟>
<사진> 원기 42년에 신축한 구법당, 원내는 강덕정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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