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살리고 살려 쓰는 운동 생명의 源을 되찾는 일

 「나의 종교관」이라고 하는 제목은 결코 학문하는 입장에서 종교를 논하라는 게 아닐 것이다. 나의 현실에서 나의 인생의 연륜과 더불어 신조를 굳히게 한 종교가 어떤 것이었으며 또한 다른 종교의 모습을 통해 종교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만 무종교인들을 귀의시킬 수 있을 것인가 등의 배려에서 몇 가지 종교에 대한 관점을 피력하고자 한다.
 나의 종교관은 대략 네 단계로 변해져왔다고 생각한다. 첫째단계는 십대에 가졌던 생각으로 나는 종교를 강력히 부정했다. 그래서 종교의 참뜻도 모르고 그저 믿기만 하는 사람들을 곧잘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나는 그 당시 주변종교들을 보고 혹은 친척 중 어느 한 분이 믿는 종교적 태도에 대해서 너무 현실적이요, 자기중심적인 것을 비판해 뿐만 아니라 강력하게 그 종교를 부정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이 도리어 내 인생에서 비교적 일찍이 종교를 받아들이게 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둘째단계로 나는 이십대에 한 종교를 가지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비로소 나는 종교관이 서지게 되었다. 어떤 구체적인 종교하나에 파묻히기보다는 그 다양한 종교들의 최대공약수는 무엇일까? 무척 고민하였다. 거기에서 나에게 얻어진 종교관은 「정의」와 「희생」이라고 하는 두 개념으로 집약시킬 수 있었다. 정의와 희생은 어떤 종교든 일관될 수 있는 본질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의만 있고 희생적 정열이 없다든가 반대로 희생적 정열은 있으나 정의감이 없는 종교는 편파적이거나 또는 자기를 위한 종교 교단만을 위한 종교가 되고 말 가능성이 짙다. 셋째단계로 나의 종교관은 삼십대에 들어와서 또 다시 달라졌다. 종교는 「유통시키는 힘」을 지니고 「감싸주는 위력」을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그 동안에 지녔던 종교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종교에 내 자신의 신앙체험이 깊어짐에 따라 달라진 관점이었다. 교역자들이 정의와 희생을 경전에 근거하여 설교하는 데에는 감탄을 불금하리만치 잘하는 솜씨지만 실질적으로 종교가 많은 세속인들을 감화시켜 주는 실천행은 찾아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불타를 여래라고도 부르는데 의미가 있다. 여래란 「오는 것 같다」가 아니라 「오고만 있다」「오도록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본다. 왜냐하면 여래의 능력은 그 감싸는 위력이 여래의 과정을 되돌아서게 하여 뭇 중생들을 오도록 한다. 인연 맺은 중생은 결코 되돌려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없이 의지하게 하는 위력을 베푼다하여 여래라고 표현한 듯하다. 불타와 같이 다른 사람을 이익 주는 것을 나의 낙으로 삼아 실천하려면 먼저 내 마음 자세가 수련되어야 한다. 이 마음 수련의 표준은 막힘없이 어디든지 다가설 수 있는 그리고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길러야 한다. 여기에서 「유통시키는 힘」이 발현되는 것이다. 넷째단계로 나의 종교관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온 것이다. 종교는 「살리고 살려 쓰는 운동」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코 나만의 생각도 아니요,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절실하게 심혼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 생각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종교를 갖게 된 그 원초적 의미가 무엇일까? 나는 많은 종교의 영역을 더듬어 알아보았고 스스로 체험하며 실천해 보려는 심정에 충분해 있었지만 결국 종교는 「생명의 源」을 되찾는 일이라고 하는 소박한 생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우주대자연 삼라만상은 하나의 생성하는 기운이 역도함에 의하여 생명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우주를 목적론적으로 생각하게 될 때 그 기저에는 생명의 응집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생명의 터전에서 일체감과 소속감을 지니게 하며 보람의 세계 가치의 세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명위에 인간이 있고 생명성을 자각한 인간에 의하여 종교를 創唱하게 되었으며 종교의 운동에 의하여 가치의 세계를 구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우주의 생성원리인 「생명의 源」을 되찾아 만인을 향하여 「살리고 살려 쓰며 살게 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만이 위대하다고 자칭하는 소이는 「살리고 살려 쓰는 운동자」가 되기 위하여 종교를 꾸미게 된 점에 있다. 종교인들은 먼저 나의 생명의 원을 파악하는 일이다.(지혜) 그리하여 나의 생명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보은) 사회정의의 실현이나 사회적 봉사활동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삶의 근원을 가르치는 종교는 현재 얼마나 되며 어디에서 인간들을 새롭게 각성시키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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