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통스러우면 모두가 지옥

 이 세상이 좋아졌다는 사람과 이 세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이 좋아졌다는 것은 과학문명의 발달로 살기 편리해졌다는 물질위주의 판단일 것이며 말세가 되었다는 것은 도덕문명의 쇠퇴로 앞날이 걱정된다는 정신위주의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솔하게 그 어떤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동등한 비율로 취급되어야할 문제이니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목을 추구한다. 그러나 행복은 어느 한쪽만으로는 불가능한 것 정신의 결함이나 물질의 빈곤은 모두 불행하다. 우리는 대종사님의 제자다. 마음 공부하는 수도인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육신생활을 위한 사회를 구하는 동시에 마음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된다. 사실 세상이 좋다 그르다하는 것은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 이는 도덕의 훈련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이 고해라 하더라도 나만 즐겁게 보면 극락이고 사람들이 낙원이라 하더라도 내가 고통스러우면 지옥이다. 우리는 기왕이면 극락세계에서 살자. 아들걱정, 딸 걱정, 돈 걱정, 살림걱정 근심걱정을 놔버리자. 이러한 불안은 욕심과 아집 때문에 생기는 것. 진리를 모르고 육척미만의 육신을 내 것으로 집착하는 그 마음을 없애자. 끊임없이 마음공부를 하자. 그러므로 불보살들은 육신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났다.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경지를 맛보기 위함이다. 대종사님은 우리가 언제나 극락생활을 하도록 이 회상을 건설하셨다. 이 대도정법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도하자. 대종사님은 「일일시시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라」(솔성요론 제8조)고 하셨다. 우리는 자신을 사피지 않고 되는대로 살기 때문에 결국은 근심걱정뿐이다. 자기가 자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불심이 중생심을 가르치는 즉 양심이 비양심적인 마음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이에 나는 어느 때나 나를 살펴보는 다음 몇 가지를 표준으로 삼는다. 첫째, 내 신앙생활에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를 살펴야 한다. 입교했을 때의 법열이라 얼마 못가서 변해버리는 신심, 변화할 수 있는 신심은 위험한 것, 저 식물도 종자 없이는 결실도 없는 것 같이 신심 없이는 불보살을 이룰 수 없다. 더구나 한번 정토회상의 대열에서 낙오되면 악도를 면할 길이 없다. 둘째, 내 마음 공부가 해이해지지나 않나 시시로 살펴야한다. 석가여래나 대종사님께서도 몇 백 년을 닦아 대각을 이루셨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마음공부, 마음의 대중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해야 한다. 사실 이 기질 변화되어가는 데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은 미안한 말씀이지만 모처럼 만난 정법회상을 양보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설사 교당에 내왕한다 하더라도 헛된 한평생을 보내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셋째, 남에게 선심을 베풀 수 있는 아량이 있나 찾아보아야 한다. 오늘은 누구를 위해서 선행을 베풀 것인가 하는 마음이 언제나 싹트는 사람은 앞으로 복을 장만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도 누구의 덕을 업고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선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받을 인과를 피할 길 없다. 직접 짓지 않고는 복을 받을 수 없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가짐 이것이 종교인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오직 사은의 공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나 국가나 세계를 위해 봉사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봉사요, 희생이다. 이러한 봉사심 없이는 복을 바랄 수 없다. 우리는 대개 봉사와 희생을 크게 생각하고 있다. 자기의 힘으로 학교를 세워서 문맹퇴치를 했다거나 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던가하는 것만이 희생이요, 봉사는 아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느 모로든지 크고 작고 간에 남을 위해 하는 일은 모두 봉사요, 희생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희생이나 봉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주변에서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길에서 노는 아이들의 코 한번을 닦아주는 것도 봉사활동이며 공원에서 휴지 한 조각을 줍는 것도 봉사활동이다. 뿐만 아니라 한 집안에서도 서로 뜻을 받아주고 세정을 알아주는 것도 일종의 봉사활동이다. 물량적 결과가 나타나야만 봉사는 아니다.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이 결여된 종교인은 참다운 신앙생활을 누릴 수 없다. 참다운 신앙생활이란 남에게 봉사심을 베풀었을 때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항상 내 마음과 언행을 살피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천여래 만보살의 대열에서 언제나 극락생활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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