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에서 교법제정 시 갖은 편의…학명스님
「불교정전」 출판허가를 맡고…태흡스님
황도불교화의 위기에서 구원을…상야스님

 우리 회상은 부처님 법에 연원은 하였으나 하나의 새 회상으로 이 땅에 창건되었다. 교리와 제도가 모두 새 판국으로 짜였고, 건설과 운영이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새 회상은 국내에 공존하는 여러 종교들과 부지런히 친선 대화를 계속해 왔고 특히 연원(淵源) 종교인 불교와는 대종사님 당시부터 각별한 친교를 가져왔다.
 대종사님 재세 시에 특별한 친교를 가지셨던 스님이 세 분 있었다. 한 분은 변산 월명암, 정읍 내장사 등지에서 도명(道名)을 드날리던 백학명(白鶴鳴)스님이고 또 한 분은 일본 조동종 관장(官長) 후보자였고 서울 박문사 주직(住職)이던 상야순전(上野舜顚)스님이고 또 한 분은 당시의 유일한 불교지 「불교시보」의 사장이던 김태흡(金泰洽)스님이었다.
 대종사님께서 학명스님과 친교하신 때는 아직 총부기지도 정하기 전인 회상 초창기의 외로운 시절이었고 상야스님, 태흡스님과 친교하신 때는 대종사님의 만년 일제(日帝)탄압이 가중되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외롭고 어렵던 시절에 세 분 스님은 다 알뜰한 우정으로 새 회상을 이해하고 성원하고 도와주었다. 세 분 가운데 학명스님은 대종사님 훨씬 앞서 열반하셨고, 상야스님은 해방 후 본국에 돌아가 열반하였고, 그 때 가장 연소하던 태흡스님만이 당시의 증인으로 수(壽)를 누린다. 대종사님과 학명(鶴鳴)스님 사이는 「대종경」과 「창건사」에 자상히 기록되어 있다. 스님은 대종사님께서 새 회상의 교법 제정을 위해 변산(邊山)에서 5년 동안 수양하실 때 갖은 편의를 다 제공하였고 정산종사에게도 갖은 정을 다 쏟았다. 스님도 영광(靈光) 출신이라 고향의 정리도 있었겠지마는 대종사님의 그 불법재흥을 위한 크신 경륜에 아낌없는 공감을 표했던 것이다. 「透天山絶頂이어 歸海水成波로다」한 스님의 글과 「絶頂도 天眞秀요 大海도 天眞波로다」한 대종사님 화답의 시는 「대종경」에도 실려 있어 너무나 유명하다. 그 후 대종사님께서 새 회상의 총부(總部)터를 물색하실 때 스님은 자신이 새로 부임하는 내장사의 일부를 제공할 테니 거기서 경륜을 펴보시라고 제의하였고, 대종사님께서는 대단히 고마운 말씀이나 절은 공유물이라 어찌 한 두 사람 뜻대로 되리오마는 이 정의(情誼)는 장차 우리 불문에 큰 서광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음으로 상야(上野)스님은, 당시 조선에 파견되어온 일본의 원로급 고승(高僧)이었다. 태흡스님의 안내로 대종사님과 새 회상을 알게 된 후로는 그 험난한 시국 아래 탄압에 시달리는 우리를 위하여 여러모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총독 정치가 범종을 공출시키고, 법당을 연성도장으로 쓰고, 예회는 집회계를 내게 하고, 경찰이 설교 감청을 하고, 그 것도 부족해서 해산을 전제한 황도불교화(皇道佛敎化) 조건으로 마지막 탄압을 우리에게 가해올 때, 스님이 총독부 요로들과 군부에 압력을 넣어 간판만은 보존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 때 간판 보존의 한 방편으로 「박문사 복취회(福聚會) 익산지부」라는 간판을 총부간판과 나란히 붙여 큰 어려움을 면했던 일은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쓰라린 기억이다. 그리고 대종사님 종재(終齋) 때에는 그 노인이 일부러 참례해서 추모하는 법어를 하는 가운데 「나는 박종사님을 우리의 종조(宗祖) 도원(道元)선사와 같으신 분으로 존경한다」하면서 법상에서 울음을 터뜨려 대중을 숙연히 감동케 하였다. 당시 그 스님 입장으로는 존경의 극치를 표하는 말씀이었다 할 것이다.
 셋째로 태흡스님은 불교시보 관계로 동분서주하면서 현실적인 면에서 불교의 명맥유지에 진력하는 한편 대국적인 입장에서 새 회상에 몇 가지 힘이 되어 주었다. 스님이 우리회상에 첫 도움을 준 것은 「불교정전」출판 때였다. 열반을 앞두신 대종사님께서 서둘러 탈고한 「정전(正典)」원고가 출판 허가 관계로 전북 경찰국에서 여러 달 동안 묵살되고 있을 때, 순회강연 중 총부에 들른 스님이 사정을 알고 자신명의로 경기도경에 허가를 신청, 불과 1주일 만에 인쇄에 부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대종사님께서 완제본은 못 보셨으나 교정용 가인쇄본이라도 보시고 떠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인쇄는 불교시보를 찍던 수영사(秀英社)에서 했고 「저작 겸 발행인 김태흡」「발행소 불교시보사」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원불교는 태흡스님 지은 책으로 공부한다는 잘 모르는 말까지 유포되었던 것이다. 스님이 우리회상에 또 한 가지 도움을 준 것은 우리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막바지에 올라 자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게 되자 상야노사에게 연락하여 우리 일을 해결하도록 힘써 준일이다. 그리고 스님이 우리와 더욱 다정해진 일은 대종사님 열반 후 초종행례를 주례해준 일이다. 천만뜻밖에 대종사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정산종사를 비롯한 우리대중은 모두가 망극한 상주(喪主)들이라 누가 나서서 집례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스님이 황급히 내려와 초종일체 행사를 우리의 요청대로 주례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주간하는 불교시보에 연2회의 대종사님 추모특집과 대종사님 방광이적(放光異蹟) 사실을 게재 보도했으며, 종재 때에는 상야노사의 법어통역을 맡는 등 그 숨막히는 시절에 우리들의 숨통을 터 주었던 것이다.
 그 어렵던 시절에 새 회상을 도와준 세 분 스님의 우정 어린 행적들은 새 회상과 연원회상 사이에 정의가 가교를 이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실히 전해질 것이며, 이 고마운 세분 스님을 우리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정화사 사무장>
<사진> 원기27년 대종사님(中)을 예방한 상야스님(右)과 태흡스님(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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