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통해 생활을 더욱 빛내자

 내가 젊었던 어느 날, 어느 선생님의 인도로 영산선원에 가서 학원생활을 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선원이란 어린 사람이나 젊은 사람은 있을 곳이 못되고 50~60세가 되어 무자력할 때에 수양이나 하는 곳으로 느꼈다. 물론 교법의 내용을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원생활을 청산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젊은 사람은 역시 사회에서 일을 해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원불교 교리를 참으로 아는 동지를 만나게 되어 『원불교는 일하는 종교이며 생활하는 종교』임을 알게 되었다. 소태산대종사님은 일찍이 일심ㆍ알음알이ㆍ실행의 靈을 구하는 3학과 肉을 구하는 의ㆍ식ㆍ주 3건의 조화를 갈파, 정신과 육신을 아울러 나아가는 원만한 생활, 즉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니라는 「영육쌍전법」을 내놓으시어 영혼구제에만 치우치던 종교계에 큰 혁신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편리만을 추구하며 정신의 가치를 부정하려드는 현대의 과학만능사조에 대한 커다란 경종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과거의 수도인은 대개 가정과 사회를 등지고 독신인 채 깊숙한 산 중에서 經이나 禪에 치중했고 학문을 숭앙하는 사람은 세간생활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 소나기가 와서 뜰에 늘어놓은 곡식이 떠내려가도 아랑곳없는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이에 반해서 현대는 자본주의라는 미명아래 나 혼자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적 행동과 물질의 풍요로 빚어지는 쾌락주의의 성행으로 윤리는 땅에 떨어지고 인간의 情誼는 삭막해지고만 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대종사께서는 이와 같은 편벽되고 절름발이의 생활을 없애기 위하여 영육쌍전법을 내놓으신 것이다. 정신수양ㆍ사리연구ㆍ작업취사의 공부와 이소성대의 정신, 방언역사, 근검저축의 생활을 교단 초창기부터 훈련해 온 것은 바로 영과 육을 병행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농사짓는 사람이 종자를 선택하는 것이나 나중에 잘 가꾸는 것도 중요하며 자동차 운전수는 일심으로 운전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에 이상이 생겼을 때에는 고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엔 훌륭한 농부, 유능한 운전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도인은 수도인대로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대로 항상 분리되어 있다면 이것은 마치 철길의 한쪽이 온전치 못하여 기차가 갈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생활 속에서 종교(진리)를 찾고 종교(진리)를 통해 생활을 더욱 빛내자는 것이 영육쌍전의 정신인 것이다. 영육쌍전의 필요를 모르는 사람들은 법회날 『교당에 나가 정신의 양식을 배워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자』고 말하면 『나는 생활이 구차하고 또 바빠서 그런 지간이 있으면 일을 하여 가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비종교인 뿐만 아니라 종교인들도 그러는 경우가 많다. 일생의 안락을 위해 육신을 돌볼 줄은 알면서도 영생을 통한 극락을 위해 정신의 양식을 함축할 줄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닐까. 마치 禪 받기를 바라면서도 禪 지을 일은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뭇 생령을 구제하고 이 지상에 낙원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진리를 체득하고 실천하여 모범적인 종교인이 됨으로써 이를 본받아 게으른 자는 열심히 일할 것이며 방종하는 자는 정신을 차릴 것이요, 낭비하는 자는 저축할 줄 알게 되어 개인마다 자기 임무에 충실하게 될 것이니 그런다면 우리가 바라는 낙원은 이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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