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정생활과 진리가 둘이 아님을 알자

 종교의 목적을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종교에서 가장 얻고 싶어하는 것은 불안에서 벗어나 안심의 경지에 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심이란 일시적이거나 불 합리에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많은 시비이해로 건설되고 있습니다. 이 시비이해 속에서 영원하고 합리적인 안심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 큰 전제 속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맹자는 「몸이 집을 떠나지 아니해도 천하를 평정한다」고 했으며 석가모니도 「모태 중에서 이미 중생제도하기를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한 몸이 안심을 얻어야 세상에 안심을 줄 수  있다는 말이며 이 한 몸이란 가장 근본적인 「가정」이라는 속에서부터 발아 될 수 있다는 곳입니다. 대종사께서는 최초법어에서 제가의 요법을 경제, 의무와 책임, 도덕의 사우와 규칙 안락한 가정의 표준 다섯 가지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정을 이루고 있는 기둥이며 이 기둥이 튼튼히 바로서 있을 때 안심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가정은 인간이 최초로 나 외의 인간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곳이며 활동의 본원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단계가 서툴러지고 활동의 본원지가 불 합리를 안고 있을 때는 안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저는 가정에서 이룩되는 네 가지 마음을 제시하여 안심을 얻을 수 있는 기본을 삼고자 합니다.
 첫째 사랑(慈)을 넓게 펴야겠습니다. 사랑은 공평합니다. 어버이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이 자녀에 따라 더하고 덜함이 없듯이 한량없이 주어만 지는 사랑을 넓게 가져야겠습니다. 사랑이란 예뻐하고 좋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상대가 아픔을 가졌을 때 그 아픔을 나누어 가질 수 잇는 마음이 함께 해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눈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넓은 사랑을 가질 이웃이 미울 수 없고, 미움이 없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불 보살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섬김(효)을 크게 가져야겠습니다. 자녀가 어버이를 받드는 마음이 바로 일상생활에도 나타나야겠습니다. 현 육신을 낳아 준 부모의 소중함을 키워서 영겁 속에서의 부모 섬김이어야겠으며 더 나아가 진리 속에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여 진리를 섬겨야하겠습니다. 이 육신을 낳아 준 부모의 소중함을 부모와 자신을 살아가게 하여 주는 진리(사은)의 소중함으로 키울 때 우리는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섬김이 곧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마음입니다.
 셋째 우애(和)를 깊이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형제의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상하의 윤리만은 불안합니다. 평행의 윤리가 있어야 합니다. 상하만이 있을 때는 주종관계만이 있지만 평행이 있을 때 조화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주종만이 있을 때는 답습되고 고루하여지기 쉬우므로 새로운 세계의 개척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평행의 협력관계가 이루어질 때 개혁되고 새로움을 위해 변혁이 시도되는 것입니다. 협력의 조화는 상대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하여 주는 데 따라 더욱 돈독히 맺어질 수 있습니다.
 넷째 순응(順)을 바르게 해야겠습니다.
 정의어든 죽기로써 실행하는 용기와 남의 일이라도 옳은 일이거든 같이 할 수 잇는 관용을 가져야겠습니다. 또한 일의 크고 작음과 먼저 해야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알아야겠습니다. 알고도 행치 아니함은 진리에 대한 배신이요 모르고 행치 아니함은 어리석음입니다. 진리에 배신치 않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리에 향하는 순일 한 마음이 계속될 때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상 네 마음을 가정 속에서 나타나게 생활하면 이것이 바로 진리생활 속에서 바로 안심을 얻을 수 있어 우리의 가정과 진리가 둘 아님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심은 멀고 어려운 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비이해가 뒤엉킨 가정생활에서 얻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진리생활을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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