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시기일수록 지도자들이 백의종군하는 결단
세상이 병들어 가는데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대산종법사는 신년 법설에서 중화의 도로 세계평화를 이룩하자고 제창하였다.
 일원주의는 세계주의이기에 일원의 광명을 세계만방에 뻗치어 하루 속히 평화 안락한 세계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우리들 일원의 사도는 신년 법설을 세계평화 실현을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평화 실현에 중화의 도를 활용하는 일보다 더욱 시급한 것은 이 나라 이 겨레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에 중화의 도를 활용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 겨레는 남북이 양단된 상황 속에서 또 다시 국론이 양극으로 갈리어 격렬한 대립 상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국론을 통일하기 위하여 國民投票(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대립 상은 오히려 격렬해 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양상으로 대립이 더욱더 激化(격화)되어 간다면 마침내 어떠한 결과가 다가올 것인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상 더 대립 양상이 격화된다면 오직 우리의 국력이 약화되기를 바라고 있는 자들을 기쁘게 해줄 뿐이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대립을 지양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하며, 그 길이 바로 중화의 도라 믿어지는 것이다. 대산종법사는 신년법설에서 「중이란 희로애락의 감정과 분별이 발하기 이전, 소심의 상태로 우주의 대 진리와 합일한 무한동력이요, 화란 이러한 중에 바탕 하여 희로애락의 감정과 분별을 나타내서 절도에 맞아 일체 만물이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얻게 하는 활생의 덕이라」밝히고 있다.
 이러한 중화의 도에 바탕한 사람은 첫째 미움과 고움을 넘어서서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돌아가 이 어려운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해답을 오직 진리에 반조하여 얻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 허심탄회한 소심의 심정을 우리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향해 진리가 명령하는 바는 오직 위난에 처해 있는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이해 권리도 부귀도 아랑곳없이, 원수에 대한 미움도 처자식에 대한 애착도 다 넘어서서 倭軍(왜군)을을 무찌르는데 아낌없이 너를 바치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 진리의 명령을 따랐기에 우리는 지금 그를 민족의 성웅으로 받들고 현중사를 통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지 않는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백의종군하는 비장한 각오와 결단으로 진리의 명령에 자신을 바치는 길 이외에 이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다.
 둘째, 중화의 도에 바탕한 사람은 진정으로 진리의 명령을 따르려는 사람이면 그가 어떠한 사람이건 혹 미운 사람이건, 고운 사람이건 모두를 살려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자기의 약점을 가장 신랄하게 지적했던 제일의 적수를 첫 내각 수반에 기 용 함으로써 자기의 부족한 점을 보충했던 사실을 우리는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양 거두의 훌륭한 지도력이 결합됨으로써 남북전쟁 이후 산적되어 있었던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 하나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겨레가 처해 있는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서로의  상반되는 의견 속에서도 좋은 점을 발견하여 서로를 살려 쓸 수 있는 활생의 덕을 발현해야 할 것이다.
 진리와 활생이 덕은 둘이 아니다. 진리에는  활생의 덕이 있고, 활생의 덕은 진리를 실현한다. 지금 우리 겨레에는 주어진 진리의 지상명령은 남북을 통일하라는 것이오 그에 따르는 활생의 덕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통일이다. 이러한 지상명령 실현을 위한 진리의 그 다음 명령은 국민의 총화를 이룩하라는 것이오, 그에 따르는 활생의 덕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명령과 활생의 덕을 아울러 실현하는 방편이 바로 중화의 도이다. 우리 일원의 사도들이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해야 할 시급한 일은 중화의 도로 민족의 덕화를 이룩하는데 앞장서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특히 躍動(약동)하는 뜨거운 피를 지니고 있는 젊은 일원의 일꾼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론 일원의 진리는 그 뜻이 넓고 깊어서 이를 다 헤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뜻을 다 헤아리고 난 뒤에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뜻을 헤아린 그 만큼 행동하고, 행동하며 그 뜻을 더욱 헤아려 가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원불교 청년들이 깊이 헤아리고만 있을 시기는 지났다. 나라와 겨레는 분명히 우리의 행동을 요청하고 잇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행동해야 할 지표도 제시된 것이라 생각된다. 혹 아직도 未洽(미흡)한 점이 있다면 누가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다 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생활 속에 실현할 수 없는 법은 죽은 법이라고 소태산 대종사는 분명히 교시하였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원불교의 사도가 되기로 작정했는가? 제생의세를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병들어 가는데 우리는 수수방관만 하고있어야 할 것인가? 혹 그 병을 치료할 처방이 떠오르지 아니해서 그렇다고 변명할 법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그 처방 법을 찾아보았는가? 아니다. 이미 대종사는 우리에게 그 처방의 원리를 밝혀 놓은 것이다 . 우리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의식이 부족한 탓이오 우리가 그 처방을 알고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職務遺棄(직무유기)다. 이제라도 우리는 책임 의식을 되찾고, 직무수행에 만전을 기해야만 우리의 선진과 후진을 대하여 할말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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