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속에서>
칠전팔기…… 역경 속에서 자라난 교당
이젠 사회활동에 적극 힘써야 할 단계

성공 그 자체보다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세상일이 다 순풍에 돛단 듯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칠전팔기란 말과 같이 온갖 난경을 극복하고 어떤 일을 성공했을 때, 그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뜻 깊은 것이다.
대종사님의 가르침이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하나, 그 일원의 법음이 세상에 퍼져가기까지에는 때로는 매우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야 할 경우도 있다.
원불교 군산교당의 발자취가 그 좋은 예. 군산교당은 그야말로 몇 번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발전해왔다.
원기 35년 봄에 당시 신태인 교우 김세화행씨(현재 중앙수양원에서 수양 중)가 군산에다 교당을 세울 서원을 가졌다. 처음 안국사라는 절에서 이대교 선생(열반, 송명호 선생 조모)이 출장법회를 보기 시작했고, 이어 조일관 선생과 당시의 유일학림 학생들이 출장법회를 보아주었다. 이 때 군산교우 김원엽, 김정엽, 김준엽, 조세환, 박세안씨 등이 총부로 가서 교당 설립을 결의하였고, 35년 6월에는 명산동 박세안씨 집에서 구타원님을 초빙하여 교리강습을 가지고 봉불식을 거행했다.
36년 봄에 김정용 선생이 초대 교무로 부임해왔다.
당시 2층은 법당으로 사용했고 아래층에서는 고아원을 경영했다. 그런데 고아원의 경영이 잘 되지 않아 난관에 봉착했고, 고아원 경영의 난관은 군산교당의 존립까지도 위협하게 되었다.
37년에 장미동으로 교당을 옮겼고, 38년에 정진숙 교무가 부임했을 때에는 고아원은 나파직접이었고 그 여파로 교당을 찾는 교우들의 수조차 현저히 줄어들었다.
<칠전팔기>
그렇다고 해서 일원의 법음이 쉽사리 물러서지는 않는다. 고아원은 정리해서 정읍고아원으로 합쳤다. 정진숙 교무와 얼마 남지 않은 교우들은 교당 재기에 발 벗고 나섰다.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그에 상당하는 결과가 오는 법 군산교당은 다시 차츰차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42년 2월에 이번에는 교당 건물이 누전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고아원 여파로 인한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제2의 수난을 맞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법당도 없이 시작해서 겨우 마련한 장미동의 교당이 모두 불타버렸으니 군산교당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에 부딪친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교우들의 장한 정신이 남아 있었다.
김세화행씨는 위험한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 일원상을 건져내었다. 법당이 다 불타도 일원상만은 건져야겠다는 그 정신이 다시 뭉쳤다.
교당을 잃은 교우들은 당시 지부장 오철환씨의 집에서 법회를 계속하면서 교당 마련에 힘을 모았다. 6개월만인 42년 8월에 창성동에 교당을 마련하고 다시 봉불식을 가졌다.
안국사→박세안씨 집→장미동→창성동으로 교당을 옮겨야 했고, 고아원 파동 등은 군산교당이 겪어야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고진감래>
49년 5월에는 정진숙 교무가 전주로 가고, 김일현 교무가 부임해 와서 2년간 교당 발전에 노력하다가, 51년 5월에는 다시 고현종 교무가 부임해왔다.
그 동안 군산교당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차츰 힘을 쌓아왔다. 52년 6월에 이르러 중앙로 3가에 오철환 지부장이 희사한 대지 118평에 법당을 신축하기 시작하여 9월에 완공했다. 54년 8월에는 다시 26평의 식당채를 시작해서 12월에 완성했다. 법당 건축비 170만원, 식당 건축비 150만원, 대지 118평(400여만 원 상당) 등 700여만 원의 돈을 군산교우들이 힘을 합한 결과였다.
지난날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끝내는 웅장한 새 법당을 마련한 군산 교우들의 정성은 단결과 노력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자랑스런 단결심>
사람이 서로화합 단결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군산 교우들은 서로 화합이 잘 되고 신심이며 공부심이 매우 장하다. 도시 교당의 경우에 화합 단결이나 신심 공부심은 그렇게 쉽지 않는데 군산 교우들은 경제적으로 약간 가난한 편이지만 신심 공부이며 단결심은 자랑할 만하다.
가난하기 때문에 큰 사업심 못하지만 서로 화목하고 힘 미치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한다.
이장은 주무(유현정 선생 모친)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어떠한 경계도 달게 극복한다. 천성이 좋고, 신심 공부심은 말할 필요도 없다. 화내는 일이 없고 주위사람들을 항상 감복시킨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후생에는 반드시 전무출신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전지완 주무는 교당생활과 가정생활이 둘이 아니다.
김상은 주무는 바느질품을 팔며 가난하게 살지만 언제나 교당을 먼저 생각한다.
강경선(강순상 선생 숙부)씨는 법당을 직접 설계하고 공사시 모든 일을 직접 감독했다.
박인창 주무(오철환 지부장 부인), 정규인씨, 서옥진씨, 김해서씨, 유종수씨 등의 신심은 전무출신에 못지 않다.
대개의 교당은 주무라면 경제적 힘이 있어야 하지만, 군산교당의 경우는 가난하지만 신심 공부심이 장한 것이 자랑이라고 고현종 교무는 말한다.
<적극적인 포교자세를 취할 단계>
군산시 교당은 이제 20여 년의 역사를 가졌다. 김정용 정진숙 김일현 고현종씨 등 네 명의 교무가 바뀌었고, 조세환 김원엽 조현진 오철환씨 등 지부장도 네 번째다. 현 부교무 심창덕 선생은 53년 5월에 부임해 왔다.
입교수를 보면 1대에 남자 179명 여자 180명 2대에 남자 421명 여자 766명 등 1,546명이나 된다.
법회출석도 평균 1100여 명인데 남자가 20여 명 된다. 청년법회에도 20여 명, 학생법회에도 40여 명, 어린이 법회에도 60여 명이나 출석한다.
경제적인 형편도 교당을 유지할 만하고 사업도 큰 도시교당에는 뒤떨어지지만 그런대로 우수한 편이다.
그러나 인구 12만의 군산시에 교당이 하나뿐이다. 현재로서는 더 늘어날 전망도 밝지 않다. 아직도 군산시민 중에는 군산에 원불교 교당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다. 20여 년의 역사이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군산에는 기독교와 천주교회가 30여 개나 된다. 말하자면 기독교 강세지방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보다 더 큰 이유는 소극적 포교자세에 있다고 보겠다. 도시 교당이면서도 사회참여나 간접교화가 부족했다. 원불교적 행사에만 치중해 왔던 것이다. 현재 군산교도소에 매월 1회씩 교화하고 있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사회활동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군산교당은 지역사회 개발이나 봉사활동 선전활동에도 눈을 돌릴 때가 온 것이다. 청년 학생 활동도 능동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도시의 봄은 식탁 위에 먼저 온다.」고 말한 시인이 있다. 현대의 종교는 도시인의 가슴속에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
군산시는 70여 년 전에 개항했고, 부산 인천 목포와 더불어 큰 항구로 손꼽히고 있다. 국민 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많은 교육기관이 있고, 생산업체도 많이 있다.
한국 합판, 백화 양조, 고려 제제, 경성 고무, 신흥 목재, 청구 목재 등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체들이 있어 경제적 수준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군산시가 갖고 있는 특수조건 때문에 토박이가 많지 않고 떠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교세 또한 이들의 이동에 영향받는 소극적 자세에서 탈피하고 과감하게 도시인의 가슴속에 부딪쳐 들어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교당 순례 차 다녀보면 전무출신 이상의 성실한 종교인이 재가 교우 중에 많음을 느꼈지만, 군산교당에서는 이러한 느낌이 더욱 커졌다.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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