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

우리는 못 당할 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시대를 당하면 으레 「정의는 살아있으니까」「사필귀정」을 말한다.
정의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기에 우리에게 항상 갈망이 되어지고 희망이 되는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쉬운 말로 「올바른 도리」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정의를 따질 것도 없이 정의는 우리들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들먹이는 것은 우리들이 사는 모습이 정의에는 못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영속적인 소망의 정의, 이것은 애타게 기다리는 기차처럼 시간이 지나서야 그 모습이 나타나는 지도 모른다. 「링컨」은 「싸움에 패배할지 모르는 개연성으로 우리가 정당하다고 믿은 정의의 지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으며 「보우든」은 <그레고리 7세전>에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했다. 그러므로 나는 유배지에서 죽는다.」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솔성요론」에서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하고 부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죽기로써 아니할 것이요.」라 가르쳐 주시고 있다. 또 대종경 인도품에서는 「마땅한 길로써 떳떳이 행하는 것(도(道))과 어느 곳 어느 일이든 은혜가 나타나는 것(덕(德))」으로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이 말씀은 정의를 「지혜· 용기· 절제가 완전한 조화를 유지하는 일」로 본 「플라톤」이나 「여러 가지 덕의 중정한 모습」으로 보고 이것은 분배적 정의와 보상적 정의로 나누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와 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의는 마음속에서만 있을 수 없고 모두의 행동으로 나타나서 우리 사회가 마땅히 되어져야 할 당연함이다. 정의가 용기를 잃고 지혜와 절제만 갖는다면 이것은 납 도끼에 불과하고 자기변명과 자기 몸 두호에 매어 정의 자체도 바르게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정의를 마음속에서만 아끼면 불법이 자란다.」고 했으며 「의를 행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는 1백 시간보다 가치가 있다.」고 마호멧의 금언은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행동에 정의를 지체하지 말자. 정복의 정의는 최강자의 정의에 바탕을 두었음에 지나지 않으며 정의는 편의와는 아무 상관없으며 법률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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