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상패

원기 56년 3월 31일 오후 3시 중앙총부 대각전은 전국 교당에서 모인 1천여 교우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대각전은 우레 같은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선망의 빛으로 가득했다. 교화 3대 목표추진운동 종합시상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지방별 종합 성적이 발표되었다. 1등에 광주와 종로교당. 영광의 상패가 수여됐다. 박수소리가 더욱 요란했다.
종로는 원기 48년 교화 3대 목표 추진운동을 전개한 이래 의정부 원남 등 9개 교당을 설립했고, 3천 6백 11명의 교우를 일원의 품안으로 이끌어 당당 1등을 차치했던 것이다.
모든 「영광」이 있기까지에는 숱한 역경이 있는 것- 종로교당이 1등의 영광을 얻기까지에는 많은 역경, 역경을 이긴 「혈성어린 단결」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종로교당의 역사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개성교당의 교우들
원기 41년 4월 26일, 「원불교 종로선교소」라는 간판이 서울특별시 중구 입정동 어느 골목길에 자리 잡은 허스름한 2층집에 초라하게 붙여졌다.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에 서울교당을 이어 2번째의 도량이 탄생된 것이다.
허스름한 2층집은 개성교우였던 양향선 씨가 서울로 피난, 하숙업을 하던 사택-. 2층을 법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하숙업을 그만 두었다. 서울교당 전이창 교무(현 동산선원 교감)가 3월부터 출장법회를 가져왔고 41년 5월 3일 이정화(현 대구 봉덕교무) 교무가 부임해왔다.
종로교당은 오로지 개성교우들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개성교우들은 6·25 전란 때 서울로 피난, 어려운 피난생활을 하면서 서울교당에 나가고 있었다.
이 때 정산종사(당시 종법사)께서 개성교우들에게 『피난기념으로 교당을 하나 만들어보라』고 부촉하셨다고 한다.
종로교당 설립에 대해서는 당시 창립의 산파역을 맡았던 송달준 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우리 개성교우들은 거의 1·4 후퇴 때 피난 나왔습니다. 서울교당에 나갔지요. 그런데 그 때가 원기 40년(1955)이던가 당시 정산종법사께서 피난기념으로 개성교우들이 교당을 하나 만들어 보라고 해요. 그래서 동지들을 규합했습니다. 20명쯤 됐어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먼저 법당이 문제였는데 양향성씨가 사택을 선뜻 법회장소로 내놓아요. 골목길에 자리 잡은 이 집이 어찌나 허스름 했던지 팔타원(현 휘경학원 이사장) 선생님은 창피하다고 간판을 떼라고 하면서 나와 보시지도 안 했지요. 다음은 유지문제였어요. 개성교당에 있을 때에도 청년단을 조직해서 장사를 했었는데 이번에도 「젓」장사를 했습니다.』 개성사람들의 강한 생활력을 대변해 준다.
교당을 분가하다.
원기 42년 3월, 종로구 인사동에 새 법당을 마련했다. 교당 창립 1년만에 1백여 교우가 넘어 입정동 교당은 너무나 협착했던 것이다. 공덕종씨(현 종로지부장)와 송달준씨의 노력, 모든 교우들의 일심합력의 결과였다.
공지부장은 처음엔 원불교에 대하여 냉담했던 분이나 지부장에 추대되고 또 세월의 흐름을 따라 원불교에 많은 이해를 가져 지금은 서울지구에서 가장 알뜰한 지부장(송달준씨의 말)으로 교당 살림을 면면히 보살펴주고 있다.
42년 9월 16일 역사적인 봉불식을 가지니 교우들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종로교당은 공덕종, 송달준, 백수정, 김묘영, 최인수, 최행덕, 왕재명, 양형선, 고혜림화, 김법진, 홍인덕, 이명숙, 김여일화, 최원각, 박성진, 송경심, 김지원행, 임현관, 김도진행, 박진신, 홍시원, 우시진화, 이춘택, 장귀만, 이윤현(무순)씨 등의 혈성어린 결정체이었다.
43년 4월 26일 지소로 승격하고 이듬해 4월 26일엔 다시 지부로 승격되었다. 실로 눈부신 발전이었다.
이 해 5월 10일엔 이정화 교무가 퇴임하고 전이창 교무가 부임해왔다. 재가교우이던 백수정씨가 출가하여 순교로 근무했다. 종로교당 전무출신 제1호인 셈이었다.
교당의 눈부신 발전은 「교당협착」이라는 즐거운 걱정거리를 교무와 교우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래서 교당신축을 위해 47년 7월 원남동에 2백 30평의 대지를 마련했다. 48년 4월 전교무가 퇴임하고 김이현 교무가 3대째 부임했다.
그 해 7월이었다. 대산종법사께서 원남동에 또 하나의 교당을 만들어 보라고 부촉했다. (전이창 동산선원 교감의 말)
종로교우들은 대산종법사의 뜻을 좇아 49년 6월 1일 원남교당을 분가 설립했다. 종로 4가를 경계선으로 90명의 교우가 원남교당으로 옮겨갔다.
눈물로 이룩한 낙원
그러나 종로교당은 곧 협착해졌다. 토, 일 양 일로 나누어 법회를 실시했다. 원기 51년에는 공덕종, 김경원, 최윤덕, 김묘영, 송달준, 홍인덕, 김순근씨 등을 중심으로 법당증축을 위한 기성회가 발족되었다. 건물대지를 물색하던 중 종로구 낙원동(현 교당위치)에 2백 평의 대지가 나타났다. 교당으로서의 입지조건이 알맞았다. 건물로 우선 법당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매입하기로 했다. 계약까지 해놓았지만 인사동 건물이 팔리지 않아 자금이 없었다. 해약의 위기에서 교우들이 권선 행각에 나섰다.
특히 서울에 유학중이던 박청수(동국대학원· 현 사직교무), 백지명(이화여자대학원· 현 원광대 교수) 한혜근(숙대· 53년에 입숙)씨의 권선행각은 눈물겨웠다.
백지명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는 공익기관을 위해 권선을 한다면 따뜻한 반응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습니다. 쌀쌀한 태도, 비정한 사회인심을 알았다고나 할까요. 허지만 J은행 본점의 문모은행장은 5만원이나 쾌척해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겐 활력소가 되었지요. 수업이 없는 날에는 셋이서 각 은행, 제약사, 상회 등을 찾아다니느라고 7· 8월의 무더위 속에서 때로는 점심도 굶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결국 D가구점에 들러 이야기 한 게 인연이 되어 인사동 건물이 팔리게 되고 일은 수월하게 풀려진 셈이 되었지요. 권선을 다니는 중 천주교인이 종교의 벽을 넘어 온정을 베풀어 줄 때는 그저 감격하기만 했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9월 14일 드디어 낙원동 건물을 매입 이전하게 되었다. 이 때의 어려움은 종로교당이 겪은 어쩌면 최대의 수난으로 교우들은 평하고 있다.
원기 53년 4월에 김이현 교무가 퇴임하고 김지현 교무가 부임했다.
교리를 익히다
법음을 전파하라
종로교우들은 교당 건물로 인한 수난을 거듭 겪으면서도 안으로 교리훈련과 실천에 매우 철저했다. 때문에 부딪쳐 오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었는지 모른다.
교당 창립 당시부터 교리강습을 실시하는 한편 신입교도를 위한 수요교리강좌도 때때로 실시하고 있다.
연말이면 고아, 양로원을 찾아 선물을 안겨주고 가슴속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일을 매년 계속해 왔다.
특히 청소년교화에 중점을 두고 교당내의 청년· 학생· 유년회는 물론 시내 학교에는 학교 교우회를 두어 적극 지원해 주었다.
49년 11월에 고려대학 교우회와 성동고교 학생회가, 50년 5월엔 성균관대학 교우회를 결성시켰다.
연원교당만도 9개 교당이나 된다.(괄호 안은 공로자와 창설된 때)
① 의정부(김영능 48년 11월)
② 원남(종로교당의 분가 49년 6월)
③ 송천(유수안 50년 8월)
④ 안양(김의정 52년 3월)
⑤ 신촌(조도운행 53년 4월)
⑥ 필동(김법진 56년 4월)
⑦ 정릉(정인제 박효진 55년 4월)
⑧ 사직(김도영 손성인화 54년 2월)
⑨ 청파동(이영수 정진보 56년 4월)
제3의 작전
종로교당의 역사는 의지의 역사였다. 개성 사람의 강한 생활력, 투지력이 그대로 반영되어 오늘날의 종로교당을 이룩했다. 거기에는 또 일원의 사도적 사명감이 깊게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교당 건물로 인한 수난은 교세발전으로 인한 차라리 「즐거운 비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비명」은 지금도 마찬가지, 평균 3백~5백의 교우를 수용하기엔 현 교당은 너무 비좁기만 하다.
금년 4월 김지현 교무가 필동교당으로 전임되고 양도신 교감(전 경남교감)과 백수정 교무, 이선종 부교무가 부임해왔다.
서울 중심가에 자리한 종로교당은 이제 수반지교당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바야흐로 제3의 작전이 계획되고 있는 것이다.
「매머드」교당 착공을 위한 계획수립이 공지부장을 비롯한 임원진, 그리고 교우 모두가 혼연일체가 된 가운데 검토되어지고 있다.
양교감, 백교무의 겸손한 교화자세가 믿어웁다. 이부교무의 청소년교화에 대한 열도는 높기만 하다.
창립요인들의 얼을 이은 「혈성 어린 단결」이 또 한 번 빛을 발하리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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