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의 대들보

응산님의 법위와 사상과 덕행을 더우잡기에는 많은 문장과 행적이 있으시니 이를 위해 내 생애의 일로 여겨 집필해보리라 생각한 바 있다. 이제 응산 숙부 가신지 어언 7년 너무도 다단하게 지내다보니 처절했으리만치 오열에 목매었던 서울 동미 빌딩 501호 사무실 새벽의 전화벨 소리가 때그르 추억이 새롭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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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께서 열두 살 때 결혼하셨다고 한다. 유시로부터 호학의 정성이 특별하셨으니 장가는 드셨어도 신방에 드실 줄은 모르시고 글 읽기 위하여 조부님 거실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글만 읽으셨다고 한다. 그 때 조부님께서 노래(老來)하시어 시봉을 위해 계조모 한 분을 보시어 가차이 모시고 있기에 이 응산 숙부 챙기시기를 극진히 하셔다 한다. 그러다가 3년 만에 조부님도 돌아가시고 이어 계조모도 돌아가셨다. 이렇듯이 의지하고 학문에 열중하시던 두 분을 여이게 되자 집으로 돌아가시어 살림을 하시게 되면서 부친께 사루어 그 계조모의 제사만은 자담하여 모시겠다고 하셨다 한다.
적던 크던 맺혔던 의리를 저바리지 않으시고 생명과도 같이 지키시고 밝이시던 숙부 응산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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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나서시매 공사에 종횡무진하시나 집에 들으심에 효도가 극진하셨다.
내 어렸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평화스럽고 단란했던 집안에 큰 풍파가 일어났다. 도산 숙부께서 출가하시고 뒤이어 응산 숙부께서 출가하시었으며 이어서 태연 정만 두 분까지 출가하시게 됨에 조부님의 역정은 절정에 다달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두 분 숙부님들이 고향에 내려오시어 집에 들려도 문후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응산 숙부께서는 절을 안 받으시고 또 역정을 내셔도 문밖 마루에 유하고 스시어 다 당하시고 기대리시다가 그대로 앉으시어 조부님이 들으시든지 안 들으시든지 밖에 소식을 공손하게 말씀드리신다.
그러기를 오랫동안 하시면 좀 풀려지시는듯하면 사 가지고 오신 과일이나 선물을 풀어놓으시고 잡수시도록 올리는 정성을 눈 여겨 보았다. 그러나 그 때 뿐아시고 그 다음에 오시면 또 마찬가지시니 또 그토록 공손하게 정성을 다해 풀어드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시고도 조부님의 열반을 당하시여 슬퍼하시는 모습은 주위사감들을 감동케 하시었고 위로 드리는 주위사람들에게 지금 같으면 그렇게 부명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을 것인데 효심이 부족하여 역정을 돋구어 드렸음이 유한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이 새로우며 출천의 효도하심에는 집안의 가훈으로 받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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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님의 엄하신 가훈 때문에 사사로운 부부애나 자녀애를 펴보시지 못하신 듯 뵈옵기에 담담하시고 싱겁기 한량이 없으신 듯 뵈었다.
일찍이 출가하시어 모든 가산이나 자녀교육까지도 숙모님이 전담하시었다. 한 평생 이렇듯이 전담하시었으나 한 마디 불평스러움을 뵌 일이 없고 낯빛 한 번 달라 하신 적이 없으시었다고 기억한다.
특별하신 인정과 자애스러우신 응산 숙부이심에 어찌 숙모님의 세세곡절을 모르실 리 없으리라 추찰이 되지만 집안 간에서라도 한 마디 말씀이 없으신 어른이시다.
열반하시기 몇 해 앞두시고 숙모님이 먼저 가시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려할 때 응산 숙부께서 밤낮 이틀 동안을 곁에 계시면서 숙모님 손을 잡으시며 한 평생 고생시키신 일이며 자녀들 일이며 일일이 그 정곡을 이르시며 정에 넘치신 위로 말씀, 앞길을 위해, 그 마음가짐과, 최후에 취하실 일까지 가르치시며 마지막 내 염불소리에 마음을 주하고 떠나라고 부촉하시던 정경이 새삼 떠오른다. 사가를 떠나 출가한 몸으로서 한 평생 가사를 담당해주는 내조의 권장부인과 그 가장으로서의 한 인간이셨던 응산 숙부의 거룩한 모습은 응산 길이 나의 사표가 될 것이다.
너무도 인간에 넘치신 응산 숙부의 모습은 법위를 갖추신 성자이기 전에 자애스러운 한 인간으로서의 성스러움을 더욱 느끼게 할 뿐이다.
생애와 작품
출가생활 36년을 한결같이 교단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신 응산 이완철 스승님.
어린 시절부터 천성이 주밀하고 인자하며,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였고, 서당에서 공부하실 때 총명이 동문에서 출중하셨다.
친형 도산 선생님을 연원으로 성지 영산에서 대종사님을 보비고 복잡한 가정을 뒤로 두고 전무출신의 길을 택하셨다.
전무출신 후에 농업부원 2년, 총부학원 교무1년, 서울교당 교무 12년을 차례로 역임하셨으며, 원기 28년 47세 되시던 해에 수위단원에 피선되었고, 대종사님으로부터 「응산」이라는 법호를 받으셨다.
6·25 동란을 당하자 응산님은 산업대장이라는 이름으로 총부를 사수하셨으며, 원기 44년에는 교정원장을, 46년에는 정화사 감수위원으로 교서편정에 심혈을 기울이시기도 하셨던 교단이 대들보셨다.
응산님은 교단이 입법, 행정, 감찰, 교화, 편찬 등 각 방면에 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던 개척의 성자.
항상 자애심 많은 어머니인 양 교단이 모든 근심 걱정 두루 살피셨고, 재가 · 출가를 막론하고 장한 일 했을 때는 당신이 하신 것처럼 기뻐하시고 칭찬해주시던 스승님이셨다.
교단을 떠나서는 기쁨도 슬픔도 모르셨고, 공을 떠나서는 사를 생각하실 줄 모르시던 순일무사하신 공심의 표본이셨다. 항상 약자를 더 챙겨주셨고 두호하셨으며 『후진들 커나는 재미로 산다.』고 말씀하시며 흐뭇해 하시던 응산님.
평범하시면서도 조촐한 인간의 멋을 함빡 지니셨던 스승님.
대종사님께서도 대중의 잘못이 있을 때는 의례히 응산님 부르시어 꾸중 하셨지만 조금도 불만이나 섭섭해 하심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응산님이 가신 지도 벌써 6주년이 되었다. 원기 53년 10월 3일 「불법은 물과 같다. 물 쓰듯이 활용하자」는 요지로 최후 설법을 마시치고 6일 새벽 5시 기침의 종소리 따라 거연히 열반의 길에 드신 것이다.
하도음(荷島吟)
손이 멀리 동편에서 오니
내와 놀을 밟고 올 제 길이 몇 구비던가
외로운 섬 아득히 바다우에 떠있고
신선봉 은은히 구름 속에 잠겼더라.
흰 돌 푸른 물은 모두가 별경이오
성근 숲 찬대에 맑은 바람 일도다
티끌세상 내려 보니 참으로 우습다.
백대의 부귀영화가 모두 다 공이려니
(원광 28호에서)
<사진설명: 서울교당 교무로 계실 때의 응산님 오른편 뒷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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