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 해외 포교 연구소장 전팔근 교수
단어 하나에도 고심을 거듭하고 15개월 강행군에 교전 영역 마쳐
지금은 24개국 2백 개소와 연락, 앞으로의 과제는 해외 교당 개척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우리

지난 10월 개교 반백년 기념대회 때 영문판 원불교 교전을 출판(4×6배판 384페이지)한 원광대학 해외포교연구소장 전팔근(46세) 교수의 말이다.
전교수는 「월말통신」과 「월보」를 편집, 일제로부터 교단을 지킨 총명과 달변의 혜산 전음광 선생의 장녀.
1945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전교수는 본교 제1회 서울 유학생으로 서울사대 영문과에 진학하여 교서 외국어 번역과 해외포교에 뜻을 세웠다.
1951년 원광대학 외국어 강사로 부임한 전교수는 1962년 봄에 본교의 첫 해외포교 계간지로 영문판 「원부디즘」을 발간하였다. (초대 해외포교연구소장 박길진 현 원광대학장)
『처음에는 「원부디즘」을 어떤 내용으로 편집할까, 인쇄용지와 표지색깔은 어떤 것을 선택할까 고심했었습니다.
파아란 표지의 「원부디즘」을 세계 각국에 우송하고 나서 나는 어떤 반응이 있을 건가 초조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앞으로 계속 보내주기 바란다는 청탁과 격려의 회신 20여 통을 받고서야 안심과 자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교수는 이때부터 간행물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원부디즘」 창간호를 본교 교사와 함께 대종사님 소개로 편집한 전교수는 「원부디즘」제2호부터 지금까지 교리를 중심으로 편집해 오고 있다.
전교수는 1967년 8월 도미, 「텍사스 우먼 유니버시티」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각 대학, 도서관, 종교단체를 방문하여 원광대학과의 유대를 맺고 본교를 소개하였다.
1969년 9월에 귀국한 전교수는 교전 영역의 붓을 들었으나 다시 강의시간에 쫓겨야 했다.
박학장의 특별재가를 얻어 1970년 4월부터 1주일에 2강좌로 강의시간을 줄인 전교수는 비로소 본격적인 교전영역의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전교수의 방에는 매일 밤 2시가 지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교단 간부들은 전교수의 건강을 염려했다.
『교전 번역 작업을 끝마칠 때까지 건강을 주십시오. 그 뒤에는 아파도 좋습니다.』
전교수는 금년 4월까지 15개월간 강행군으로 교서 외국어번역의 붓을 달리면서 기도(심고)했다.
교전 영역을 마친 전교수는 인쇄소에서 다시 3개월의 교정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초고를 보고 난 교정지는 얼마나 오자가 많은지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영문판 교전이 되어 나올까 걱정스럽기만 했습니다.』
18개월간 기대와 불안으로 집념하고 진통을 겪어온 전교수는 영문판 원불교 교전 「샘플」을 손에 들고 몸을 떨었다. 신기했다. 이것이 과연 내가 번역 출판한 책인가. 벅찬 감격과 뿌듯한 희열로 뛸 것 같았다.
『외국어 번역은 의역을 하게 되는데 번역은 창작에 못지않게 어려운 작업입니다. 한 단어를 선택하는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번 교전 영역에 있어서 어려웠던 것은 대소유무 게송 정신수양 이런 단어들이었습니다. 한편 성리품(대종경)과 일원상법어(정전)는 멋이 있게 번역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건강을 염려했던 전교수는 더욱 건강한 모습, 좋은 「컨디션」으로 새로운 계획과 의육에 충만해 있다.
『나는 앞으로 세 가지의 과제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어 한국어 대역판 원불교 교전을 출판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해외 교무들이 사용하고 외국인이 읽을 수 있는 영어판 원불교 교전 주해판을 발간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금 24개국 2백 개소와 연락을 갖고 있는데 앞으로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 우리 교당을 만들고 싶습니다.』
전교수의 말은 계속된다.
『해외 포교란 실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해외포교에는 자선사업이나 사회봉사를 통한 포교방법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육영정책에 의한 해외포교사 양성 또한 시급한 문제입니다. 유능한 해외포교사 전법사도로서의 자질 또한 검토되어야 하구요.』
전교수의 눈은 어떤 숭고한 결의에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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