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눈 밝은 귀

 이 세상을 사는 사람 중에 잘 살다 잘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하나나 있을까요?
 누구든지 건강한 몸으로 부귀와 지위를 갖고 살다 죽기를 원합니다. 허지만 남보고, 남보다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가 죽었다고 그 사람이 잘 살다 잘 죽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살고 있으며 잘 죽을 사람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잘 사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첫째 부처와 하나님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정 직장 국가 속에서 종적으로나 횡적으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일하고, 바르게 행동하여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둘째 유산을 많이 장만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각자가 처한 곳에서 땀흘린 노력의 대가가 자기는 물론 가정과 국가 사회, 세계를 위해서 유익을 줄 수 있는 생활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유산에는 현상적으로 타나나 생활을 풍족스럽게 하여 주는 물질적인 것과 영원한 빛으로 남는 무형적인 정신의 유산이 있습니다. 우린 마음의 양식으로 물려받은 성자들의 교훈을 생활에 활용함으로써 우리들도 우리 자손에 물려 줄 정신의 유산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세상에 살되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밝은 눈과 밝은 귀를 가져야 합니다.
 밝은 눈과 밝은 귀를 가진 사람이어야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밝은 눈으로써 자기의 결점을 바르게 발견하고, 밝은 귀로써 남의 충고를 바르게 들어 자기의 결점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잘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 결점을 발견치 못하고, 남의 충고까지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어찌 잘 살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재색명리의 유혹의 세상을 살면서 밝은 눈 밝은 귀를 갖는 것은 꾸준한 기도의 생활과 참회 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잘 죽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째 죽을 자리에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죽을 용기가 백번 있는 사람은 죽지 못해도 한번 있는 사람은 죽을 수 있다」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사람과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알고 있습니다. 「살아 죽은 사람」은 자기 일을 못한 사람이요. 「죽어 살은 사람」은 자기가 해야할 일을 마친 사람입니다. 정전 솔성 요론 13ㆍ14장에 보면 「정의 어든 죽기로써 하고, 불의 어든 죽기로써 아니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죽을 자리에 죽고, 살 자리에 살 수 있는 힘의 말씀입니다.
 둘째 애착 없이 죽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잘 살았어도 죽음에 임해서 주위의 인연을 잊지 못하거나 자기가 하던 일에 끌리고 보면 죽음에 매어서 다시 받을 세상을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란 곧 죽음을 당하여 한 마음 잘 챙겨 온전한 마음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애착의 인연에는 선연보다 악연이 더 무섭다고 했습니다. 악연을 맺지 않는데는 평소 감사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악연은 먼 곳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운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성현들께서 「잘 죽으면 잘 낳는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곧 새 세상의 새 생명을 얻는 처음입니다.
 잘 죽어 잘 낳고 잘 낳아 잘 살고, 잘 살다 잘 죽는  것이 우리에겐 영겁을 통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인들 함부로 살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모두 잘 살아 잘 죽고, 잘 낳아 영겁을 한결같이 살 수 있게 공부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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