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이 중공을 방문하게 된 기사가 세계의 「토픽」이 되고 있다. 사반세기 동안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국교를 잇는 움직임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중대한 관심이 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그들이 주는 암시는 『선진국은 적이 없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으나 후진국들이여, 너희들은 우리 대신 열심히 싸워다오.』 아쉽게 주는 몇 푼의 돈을 찢겨 뜨려야 하는 모순된 교훈을 내린 것이라 생각된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아쉬워하는가? 일차적인 문제는 경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타처에 원조할 수 있는 경제력에 앞서 우리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자립경제상에 무엇이 부족한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 주변에 소비와 낭비 때문에 외원(外援)을 바라며 허덕이는 사례는 없는가. 속 깊이 반성해야 할 과제이다. 많은 차관생활을 하는 우리 형편 가운데 「라디오」에서나 신문에서, 거리에서나 극장에서, 소비만이 미덕인양 물품광고를 하여, 소비성을 자극하고 있다.
현 사회에 그 몇이 저축하고 사는가 여기에 대하여 수일 전에 유치원 때부터 만들어 장학기금을 내놓은 미담을 우리는 들었다. 이 이십만 원이 신문, 잡지, 약병, 「사이다」병 등을 모아 국민 학교 졸업과 더불어 학교 장학기금으로 기탁한 김시우 군의 정신은 세상에 높이 찬양해야 할 희귀한 정신이다. 많은 어른들이 바람을 일으키는 사치풍조를 넘어선 어린 천사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57년 종법사 새해 법문에 신생활 운동 요강을 제창하였듯 우리는 더욱 요청되는 것은 정신, 육신, 물질 간에 낡고 비생산적이며 소비적인 사고방식을 크게 전환시켜야 한다.
이 길만이 약소민족이 선진들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이요 생활능력이다. 이제 유행에만 따르다간 영원 약자요 후진의 괴로움을 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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