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봉래정사에서 문정규에게 물으시기를 『벽에 걸린 저 달마대사의 영상을 능히 걸릴 수 있겠는가.』하고 물이심은 의식 없는 종이 영상을 거리게 하는 마술을 보시고져 하심은 아니다.
이 뜻을 안 문정규 선진 능히 걸리겠나이다 하고 스스로 곧 일어나 걸었다.
현실분별 세계에서 분별할 때 정규 선진과 달마 대사가 분명 다르나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달마대사나 문정규 선진이 낳기 이전에는 이 세상에 없었던 분들이 이 세상에 왔다 어디로 가시고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은 없는 데서 왔다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 이름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크고 적음이 다르다. 그 뿌리는 하나 오는 것도 거기요 가는 곳도 거기인 모든 것은 모두 하나! 갑이라 을이라 이름 짖는 것도 한갓 부질없는 분별이요 미오의 범성(凡聖)(범부와 성인)도 너와 나의 피차도 없는 둘 아닌 성품의 진제에서 볼 때 「정규」 선진의 걸음이 달마대사를 능히 걸림이 된다.
그러기에 대종경 문정규 선님 걷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정규가 걷는 것이니 달마의 화상을 걸렸다 하겠는가.』하시는 지라 정규 선진 말하기를 『동천에서 오는 기러기 남천으로 갑니다.』하였다. 이 대답으로 정규 선진의 걸음이 달마대사의 걸음인 것을 입을 열어 분명히 대답을 했다.
다시 해설을 더 하는 것이 구차한 일이요 조문상덕이 되기 쉬우나 달을 가르치는 데 손가락을 빌리듯이 감히 해설을 부연하면 새는 하늘을 날으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놀며 또 땅위를 걸어 다니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들의 움직임과 삶의 양상은 천태만상으로 각기 다르나 그것들을 살리는 것은 따로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의 존재에 의해서 살아간다. 오직 하나이신 이 절대의 일(一)은 만유개개에 면면히 흐르고 있어서 나누워 놓으면 삼라만상 만유요 합하면 하나다. 이 하나의 성리로 볼 때 기러기도 사람도 그 중의 달마대사도 둘이 아니므로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이 기러기 날아가는 것을 달마대사가 간다 해도 성리의 입장에서 망언은 아닌 줄 안다.
또 기러기가 동천에서 남천으로 가든 서천에서 동천으로 가든 별 관계없으나 여기에 그저 넘길 수 없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한계 없는 허공에 동천과 남천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사람이 스스로 동서남북을 가리고 동천이다 남천이다 하여 하나의 허공을 달리 생각함과 같이 실체가 아닌 모든 언어명상에 집착하여 서로 다른 것 같이 달리 생각하는 집념을 버려야 성품의 진체를 볼 수 있다는 뜻을 은근히 표시하고 있다.
<감곡교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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