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구조의 확장 (끝)
<원불교의 경제관은 어떻게 볼 것인가.>
자립경제의 기본 원칙 제시해
고리대금식 경제행위를 죄악시
신용조합의 결성은 만시지탄(晩時之歎)
생산기관의 확장과 그 기능

앞에서 전근대식 경제윤리를 고찰하였다. 가진 자의 소비성 경제윤리를 고대 및 주세 경제관에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상행위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보며 농노제를 써서 상하신분질서를 엄격히 하고 하층의 가난한 자를 불평 없이 더욱 복종만 하도록 짜여진 봉건주의의 경제윤리를 논하였다. 또한 현세에서의 「무비(無悲)적 달성」을 꾀하려는 동양인의 종교는 「막스 웨버」에 의한다면 유교나 불교나 도교 할 것 없이 모두 주술성이 내재함으로써 거기에 공통적인 생활 태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지 고유의 이해에 부딪치면 조금도 양보치 않고 두터운 껍질 속에 들어박힌다는 비타협성이라고 지적하였다.
종교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인간들에게 진취적 사상을 제시하며 항상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는 그 시대 그 사회를 진취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일반 세속 사회의 뒤를 따라가며 사(事)(사(死))후 처리만을 담당한다는 느낌을 준다.
현대 종교는 자연과학에 의하여 우주관, 내세관이 수정되고 또 교리 상으로도 급히 변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도전 못지않게 종교가 또 한 번 크게 달라져야 할 형편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고도의 성장을 보인 현대 경제의 동향이다. 경제 발달로 인한 현대의 충격은 종교에 있어서 생활관을 또 한 번 뒤바꿔 놓은 셈이다. 따라서 오늘의 종교는 경제관을 새롭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자립 경제책이 뚜렷하지 못한 종교 단체는 유사종교로 전락될 것이다.
성금에 의지하려는 기생형태의 교단 유지방식으로서는 현대 상업사회의 경제구조와 체제속에서 도저히 종교로서의 제 구실을 못할 것이다.
현대 이후의 종교는 그 종단 자체 내에서 생산 기관을 만들고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한 종교가 자칭 성직자라는 명호를 붙이면 『우리는 영혼 구제에만 책임이 있다.』『식생활은 자연히 해결된다.』『……』는 따위의 관념적 가치에만 몰입한다면 시대 역행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종교단체에서 생산기관을 확장시킨다는 문제는 이제까지의 모든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자들의 성금에만 의존하여 모은 그 부동자금을 고리의 식리를 따 먹으려고 세칭 「돈 놀이」하는 종교인들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고리대금식 경제행위는 중세 시대의 교회에서도 죄악시함으로써 영주들과 다툰 것이었는데 하물며 현대 종교로서 이러한 죄악을 범한다면 그것은 시대 착오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보다 좀 더 바람직한 것이 있었다면 종교인들이 성사를 명목으로 모은 성금을 어느 기업체에 간접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이 고작이었다.
원불교를 창도한 대종사는 『종교인이라 하여 과거에는 놀고먹는 폐풍이 많았다.』고 지적하였으며 교단 형성에서 성금은 바라지도 않았다. 먼저 교단 경제를 다지기 위하여 생산성을 찾았다. 앞으로도 생산 구조의 확장은 원불교의 교세와 비례하는 것이어야 될 것이라고 본다.
신도들로부터 성금이 필요할 경우는 공사(공의)에 의하여 일정한 목적을 세우고 그 목표의 한도약을 명시한다.
오늘날 원불교에서 육영재단이니 요양재단이니 교화재단이니 또 혹은 봉공회 기금이니 총부 유지자금이니…하는 등은 모두가 교세의 번창과 더불어 이에 부응하여 일어난 경제운동이다. 이 성금의 운영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생산 기관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하여 오로지 종교본연의 사명을 다하려고 세워진 원불교의 교화, 교육, 자선의 삼대 목표를 실현하는데 유감이 없도록 자립경제 체제로 하루 속히 정비되어야 한다.
이것이 원불교 60년대의 크나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타인의 노동력을 빌리지 않고 그 종단 자체가 직접 생산기관을 만들고 그 속에서 교역자들이 감독하며 또 노동함으로써 신용 있는 물건도 만든다. 교단의 생산 활동은 신도들과 직결되어 그의 생활을 개척해 주며 그 가운데서 자립경제의 원리원칙도 실제적으로 교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경제구조를 통하여 신도들의 자금도 유통시킬 수 있도록 신용조합도 형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출자와 대부 등 자금회전을 교단 자체 내에서 원활히 한다면 매우 성공적인 종단이 될 것이다.
원불교에서 요즈음 젊은 동지들의 손으로 출범한(1971년도) 신용조합운동은 대종사의 정신에 입각해 본다면 만시지탄이 없지도 않으나 바람직한 것이며 기대되는 바 크다.
결국 타종교와의 융통도 다만 이념적인데 그치지 않고 매우 건실한 신용조합이 각 종단 별로 결성되고 이를 매개로 새롭게 거래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대종사는 일찍이 영혼 구제로만 믿고 따르게 하던 존래(存來)식 종교를 지양하였다.
물적(物的) 육적(六賊)인 생활의 기반을 영혼구제 못지않게 확립하고 병진하도록 가르친 것이었다. 따라서 원불교에서의 자립 경제책은 교단 창립 당시부터 고조하며 모색했을 뿐만 아니라 신도들의 경제생활 윤리로도 강조하여 왔다.
끝으로 원불교가 제시하는 자립경제책의 기본원칙을 지적해 본다.
첫째, 생산적 노동력을 중시하고 이를 개발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산성 없는 순수한 소모를 막으며, 언제 어디서나 자력을 양성하는 대중을 놓지 말자는 주의다.
둘째, 수지대조를 잘 맞추어 「적자 인생」「마이너스 인생」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먼저 자기 수입 한도를 알아서 그 범위 내에서 지출을 허용하고 한 푼이라고 저축을 위해 절제, 검약의 생활을 지속하자는 것이다.
셋째, 축적된 재화를 사생활로만 응용하지 않고 공익의 보람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가정 경제부터 남녀가 권리 동일한 원칙에서 자금을 축적하되 그것은 사회복지의 이상을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
<원광대 문리대학장>
차례
1. 개교반백년을 넘어서서
2. 행정체제의 확립
3. 생산구조의 확장
4. 입체적 교화의 실현
5. 인재양성의 다양화
6. 사회에의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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