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위기에 선 현대 종교

사이비종교의 고발에 앞서 사이비신자의 각성이,
유사종교의 규탄에 앞서 기성종교의
유사성향의 지양이 시급한 현실이다.
인류 역사는 종교의 힘으로 창조해왔다. 그러나 이 창조적 질서(Ordersof Creation)를 담당해 온 참다운 종교는 어쩌면 오늘의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 속에서 일찍이 오늘날과 같은 기조 악(惡)을 허용한 일은 없지 않을까. 과학과 종교의 불일치, 목적과 수단을 뒤바꿔 놓은 공산주의의 대두, 지식을 파는 현대적 소피스트(sophist), 극단적 향락의 소유자 챠르바아카(순세귀속) 등 「비종교의 종교화」는 우리의 인간사회를 판치고 있다.
이미 형태화된 종교(교단주의 또는 교회주의)들은 종교를 믿는 신자들에게 교단과 교회가 존재하는 까닭을 명백하게 드러내주지 못한 채, 그대로 자기가 믿는 종교만을 절대적으로 믿도록 열심히 가르쳐왔다. 과연 야스퍼스의 말과 같이 분열은 발전일까?
「비종교의 종교화」란 종교일 수 없는 것들이 감히 종교인 것처럼 종교의 형태를 취하고 나타난 모습이다. 직접적으로 지적한다면 사이비종교 유사종교의 대두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비종교의 종교화」를 좀 더 넓은 개념으로 설명해 본다면 겉으로 기술만을 개발하여 인간 삶의 편의를 도모해 줌으로서 대중들은 현실적인 향락과 행운을 기다리는 가운데 지리와 정의와 봉사를 잊어가고 있는 사조를 말하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라는 형태학적 고발에 앞서 이미 포섭되어 있는 각 교파들 속에 어떻게 올바른 신념을 심어줄 것인가. 나와 내 편만을 위한 기도의 감행이 아니라 진정으로 당신들의 저편을 위한 기도가 행해질 수 있도록 하는 가르침이 아쉽다. 사이비 종교의 고발에 앞서 사이비 신자의 각성이 있어야 하며, 유사종교의 규탄에 앞서 기성종교의 유사성향의 지양이 더욱 시급한 현실이다.
비종교의 문화가 어떻게 현대 세계에서 조장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비단 종교학자들만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 종교학자들은 열심히 현상학적 비교학적으로 모든 종교를 연구 기술하여 인간이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한,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종교가 긍정되어져 왔음을 증거 하는 것으로 그 역할은 충분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직접 종교의 간판을 걸고 교화하려는 종교인들 특히 각 교파의 지도자들은 종교학자들은 종교학자들의 이와 같은 성과를 예의 주시하며 공부하여 이를 자기 종교의 교화활동에 충분히 반영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 정신을 오늘의 사회에 실천적으로 증거 해 줘야 할 것이다. 아무리 파국의 위기가 지상에 도래한다 하더라도 모든 종교 속에 흐르는 그 보편적인 종교성(Religion)을 헤치지 않도록 종교인들은 우리의 현실에 그것을 구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0세기의 평화주의자 B? 러셀경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기독교를 창교한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정신과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기독교사는 모순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예수는 자기 전부를 희생했는데 그와 반대로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에는 전쟁을 도발시키는 모순에 차 있기 때문에 평화주의자로서는 그러한 종교를 믿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A? 토인비나 퍼슨(Person)과 같은 사람은 19세기 서구에서 대두한 「맑시즘」은 기독교가 책임져야 한다고 외쳤다. 성자혼의 협익성을 보이는 독선적 신조가 대중의 자만을 확대시키는 것을 기성 종교는 크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종교가 역사 안에서 창조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의 종교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념과 책임감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 올바른 신념은 내가 절대적으로 믿는 그 신앙 신조가 타종교 안에도 있을 것이니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신념을 세우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가 믿는 종교에만 그 절대성이 있고 다른 종교 속에는 아직 그러한 진리가 들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 하에 타종교와 접근해 보지도 않으려는 태도는 성자 혼에 입각한 창조적 질서를 파괴하는 조작주의라고 본다.
그리고 한 종교의 가르침은 항상 인간 모두에게 책임감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절대적 진리(神佛)가 지닌 영원성과 무한성이란 권능(속성)앞에 인간은 언제나 유한자이며 한계성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해야 된다. 그러나 종교를 모르는 인간들은 그 유한성 한계성을 모르고 만용을 부린다. 살기만을 원하여 살려고 살려고 움직이기만 한다. 그러다가 한계상황(죽음)에 부딪치면 좌절이 있을 뿐 초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종교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유한성을 자각케 해야 한다. 그 자각은 도리어 무한과 영원으로 통하는 고귀한 생명 안에 내가 있음을 느끼는 희열이라고 표현해 본다.
이를 다시 생의 일회적 자각이라고 불러본다. 생명의 일회적 자각에서부터 취해지는 일보 일보의 행동은 감히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게 된다. 이러한 책임감은 유한한 자기를 통해서 영원과 무한성을 실현하려는 태도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원광대 교학대학장·본사 논설위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