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11-20 16:00 (수)
사설=화동으로 평화를
사설=화동으로 평화를
  • 원불교신문
  • 승인 1973.01.25
  • 호수 8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해 법설을 받들고
계축년 새해를 맞으면서 대산 종법사는 화동의 도를 천명하며 개인의 처세의 요결이 될 뿐 아니라 사회 국가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평화를 성취 유지하는 길이 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화동의 도는 중도가 최상이니 이에 의하여 원만한 처세를 하자는 것이요, 둘째는 정성을 다하여 일의 성공에 노력을 하되 그 성패는 진리에 맡길 것이지 인위적으로 조작 왜곡함으로써 비리를 저지르지 말자는 것이요, 셋째는 전성(全盛)의 뒤에는 전쇠(全衰)가 있음을 알아서 넘치는 것보다 여유를 남기는 처신을 하자는 것이요, 넷째는 크고도 작은 것 같이,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것 같이 하여 스스로를 과시함에 너무 열중하지 말자는 것이요, 다섯째는 정확히 모르는 것이나 불필요한 일에 경동하지 말고 침묵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생각건대 오늘날의 어지럽고 험악한 사회상이나 개인 관계를 관찰한다면 인간성품의 극성스러움에 연유한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극한이라는 말을 즐겨 쓰고 말끝마다 죽겠다를 붙이기 좋아하는 습성은 이러한 극성의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사를 신경과민적인 양자택일 방식에 의하여 해결하려는 것이라든지 그 앞날의 결과가 뻔한 데도 불구하고 갈 데까지 가지 않고서는 멈출 줄 모르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그러다가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지를 부려 패가망신을 자초하고 마는 어리석음이라든지 위만 쳐다  보고 아래를 굽어볼 줄 모르는 과욕 침소봉대 격으로 자기 과시에 급급 하는 자만 부화뇌동하는 주견 없는 경거와 무불간섭의 망동은 대인감정의 자극은 물론 사회의 불안 반목 국제분쟁의 씨를 갊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 성격의 극성과 극성의 충돌에서 오는 살벌한 기운은 사회 국가에까지 영향을 끼쳐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마는 것이다.
현하 세계정세는 평화지향자세를 견지하면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도 난산에 신음하던 월남문제도 이제는 휴전협정 조인 직전에까지 도달한 듯하며 내왕이 끊겼던 여러 나라들이 서로 내왕의 길을 터서 대화를 교환하고 있으니 이것은 분명히 고무적인 현상이며 기쁜 이념이 차이로 날카롭게 대립했던 국가들이 이제는 실리위주로 사고의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는 타국의 회생을 강요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우선 전쟁 위기를 모면했기 때문에 일단의 안심과 반가움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동물로까지 호칭되는 그 몰인정과 이해를 내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나라의 실리 추구에 급급한 나머지 다른 나라의 희생을 강요하는 데에서 오는 경제적 번민이 인류를 엄습할 날이 없다고 그 누구가 장담할 수 있으랴. 앞문의 이리를 피하고 나니 뒷문의 범이 달려드는 격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목전의 평화를 고맙게 생각하고 반겨 맞이하는데 인색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그러나 그 평화가 토착화 되고 영구화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은 너무도 간절한 것이다. 이러한 간절한 소망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하기 위하여는 우리 개개인의 노력이 깃들여야 하고 그 노력은 우리의 마음공부에 경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화동이 도에 철저하여 중도를 지키고 분수를 알고 겸허하고 성실한 생활 태도를 갖는다면은 그 훈더운 바람이 사회를 어루만지고 국가를 얼싸안아서 안정과 번영과 평화는 그 속에서 배양될 수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새해 법설로 선포된 화동의 도를 적게는 개인의 처세의 비결로 삼을 것이거니와 크게는 세계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바탕을 터 닦는 연모로 삼아서 일일시시 자성해 갈 것을 70만 교우는 굳게 다짐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