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현장에서 생생한 소리를 듣는다.
불연의 땅 「영광」

◇ 본사에서는 소태산 대종사 탄신 1백주년을 11년 앞두고 기념사업이 전 교단적으로 준비되고 추진될 수 있도록 금년 1년을 계몽의 해로 정했다. 이에 따라 1면에는 탄신 1백주년을 앞두고 대종사의 이념을 오늘의 현실에 조명하여 보는 특별 논단을 연재하고 있으며, 2면에는 대종사 십상 성화를 해설을 담아 연재하고 있다.
이어 이번 호부터는 3면에 대종사의 발이 닿고 숨결이 서린 곳을 찾아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일화와 기록 등을 박용덕 교무(교정원 교화부)의 발굴 자료를 입수하여 연재한다.
박용덕
<교화부 편수과>
여러 가지 고증으로 「영광」은 바다 「구수산」은 섬
「백수면」은 「백(百)」에서 머리부분의 「일(一)」을 뺀 아흔 아홉을 상징 구수산 99봉을 의미
「구수산」의 모양은 모태 중의 태아와 같은 형상이다.
「불갑사」는 백제 때에 불교가 처음(갑(甲)) 전해진 절 의미
불교가전해온 동진(東晋)의 남경(南京)은 위도상으로 법성포와 가장 가까운 거리
영광읍 지에 모악산(불갑산) 산상의 해불암(海佛庵) 유래 기록
「옥녀봉」은 처녀가 법성포에서 오는 성인을 기다리는 모양
「법성포」는 성인이 법을 가지고 드나드는 나루터
「구수산」엔 구암사를 비롯 수도암, 무운암, 가야암 등 9개 절
<사진설명: 영산선원에 옮겨진 구수산 당간 지주>
<사진설명: 구수시가 있었다는 구수산의 절골>
<사진설명: 수륙 변천의 증거인 옥녀봉의 조개껍질 바위들>
전라남도 영광은 원불교와 인연이 깊은 땅이다. 이 땅은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이 탄생한 곳이요, 성장한 곳이며 대각을 한 성지며, 회상의 기초를 가졌던 땅이다.
백수면 길룡리는 전라도에서도 아주 궁촌 벽지에 속한다. 하루에도 두 차례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나는 이 한미한 두메산골에 농민의 아들로 돼 소태산이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까.
필자는 이 영광에 대한 모든 자료를 찾아보았고 실지로 영광의 곳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영광 연혁
삼국사기 잡지 제5 지리(地理) 3에 보면 「무령(武靈)군은 본디 백제 때 무시이(武尸伊)군인데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이다. 지금은 영광군으로 세 현-장사, 고창, 무송(무장)-을 거느렸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에도 같은 기록이 나오고 군명이 무시이 무령 외에 「오성(筽城)」「정주(靜州)」는 고요한 땅, 열반 적정을 이르는 뜻이 아닌가.
영광에는 이름 있는 고찰이 있다. 모악산 불갑사가 그것이다. 불갑사 창립 연대는 「나제지시한위지간미지수작(羅濟之始漢魏之間未知誰作)」(1911 조선총독부 내무부 간행 조선 사찰 사료)이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현재 불갑사에 게시된 연혁에는 백제 침류왕 원년 신사 존자가 창건했다고 게시되어 있다. 인도 승 마라난타가 東晋으로부터 와서 불갑사를 짓고 나주면의 불호사(현 불회사)를 창립하였다는 것이다. 불호사 중찬급단청문에 「백제 침류왕 원년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여기에 이르러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때는 불법이 처음으로 백제에 전파되던 해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침류왕 항을 보면 「추(秋) 7월에 사신을 동진에 보내 조공을 바쳤고 9월에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오니 왕은 맞아들여 궁내에 모시고 예와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불법이 여기서 비롯하였다. 침류왕 2년 봄 2월에 한산에 불사를 짓고 도승(度僧) 10명을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산(漢山)은 경기도 광주 땅을 말하고 백제의 고도 위례성이다(이능화 「조선불교통사」하편 pp. 91, 102 참조)
1911년 조선 총독부 내무부에서 당시 전국 현존 사찰의 비문 편액 기타 고문 서류를 채집하여 간행한 「조선사찰사료」에 의한 불갑사 창설 유서는 신라 백제의 한위(漢魏)가 시작되던 사이- 북위(北魏)가 일어나던 서기 386년, 침류왕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난 이듬해이므로 침류왕 대에 불갑사가 창건되었다는 설이 설립된다. 그러나 왕성(王城)에 겨우 불법이 전래되던 때에 어떻게 무시이 고을에 절이 창립되었을까. 더 연구하고 고증해 볼 숙제이다.
전설 속의 영광
영광 지방에 전래되는 설화를 중심으로 불교와의 인연관계 이야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동진(東晋)은 위도상으로 영광 법성포와 가장 가까운 양자강 하류 남경(南京)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 혹시 불교가 처음 이곳을 통해 백제에 상륙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지금은 서해 벌이 밀려와 갯벌이 자꾸 간척이 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푸른 물줄기가 영광 성내는 물론 묘량면 운당리까지 들어왔고, 염산면 쪽에서 들어오는 물줄기는 불갑산 기슭까지 들어왔다 한다.
1627년(이조 인조 3년)에 편성된 영광읍지에 보면 모악산(불갑산) 산상에 해불암이 있는데 이 절의 부처는 바다로부터 떠내려 온 부처(재모해악산상두고유일불자해상부래고잉호(在母岳山上頭古有一佛自海上浮來故仍號))라 하여 해불암이라 일컬어졌다.
불갑사라는 절 이름도 백제 땅에 불교가 처음으로(갑(甲)) 전해지며 생긴 절이래서 불갑사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불갑산은 해발 519.5m의 그리 높지도 깊지도 않는 산이지만 예전에는 갑옷 비늘처럼 절이 많았다고 한다. 현존 산내 암자만도 5개 암자가 있다. 전의암, 용문암, 수도암, 해불암, 용천사 등이다.
동진과 위도 상으로 가까운 법성포는 불교와 관계 깊은 이름이다. 지명 그대로 법성포는 법을 가진 성인이 드나드는 나루터를 말한다.
혹자는 말한다. 「남조선 해도(海島) 중에 성인이 난다.」하였는데 그곳이 장성 앞 바다라는 것이다. 장성은 내륙이라 바다와 접하지 않은 곳이며 바다와 가까운 지역은 영광이다. 그런데 예전엔 영광읍까지 물이 들어왔고 특히 구수산은 삼면이 바닷물이 들어차 가히 섬이라 할 만 하였다.
혹자는 다시 예언한다. 「계룡산에 등극할 성인이 장성 앞 바다 자하도에서 신병(神兵)을 교육시키고 있다.」고.
법성포에서 구수산 산협을 끼고 길용리까지 굽이굽이 들어오는 물줄기는 산(山) 태극 수(水) 태극의 태극형을 이룬다. 이 물줄기 가운데 구수산에서 떨어져 나간 두 개의 작은 섬이 있는데 큰 소드랑 섬 작은 소드랑 섬이다. 이를 사람들은 일월도라 하고 이는 공자가 탄생한 산동성의 지형과 흡사하다고 하다.
길용리에는 아담한 산 봉오리가 하나 있는데 산 모양이 마치 처녀가 단정하게 머리를 땋아내리고 법성포를 향하여 앉아있는 자태다. 이를 옥녀봉이라 부르는데 이를 또한 망성봉이라고도 한다. 옥녀가 법성포에 성인이 오는 것을 기다린 대서 부친 이름이다.
지형을 볼 줄 안다는 경상도 어떤 사람은 길용리에 들어와 구수산을 보고 「미상불 성인이 나올 만한 곳이다. 바위 모양을 본 게 말캉(모두) 좌불잉기라. 건(乾)삼삼(三三) 곤(坤)삼삼(三三)잉기라.」하였다.
구수산 백수면 길룡리
현재 영광은 1읍 10면 127리의 군이다. 백수면은 영광군의 10면(대마, 묘량, 불갑, 군서, 군남, 염산, 백수, 법성, 홍농, 낙월) 중의 1면이다. 백수면은 구수산이 차지한 면적이 전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백수면이란 이름은 구수산에 아흔 아홉 봉 아흔 아홉 샘(수(岫))이 있대서 백(百)에서 일(一)을 뺀 백수면이라 하였다.
구수산의 최고봉은 봉화재가 375.5m, 천정리 뒷산 수리봉(속칭 천장봉)이 350.5m이다.
구수산의 맥은 노령산맥의 말달이며 노령산맥은 소백산맥 태백산맥으로 연하였고, 태백산이 시작되는 황해, 평남, 강원도 경에서 추가령 지구대, 마식령산맥, 언진산맥이 만나고, 여기서 낭림산맥 장백산맥으로 연한 산맥은 한반도의 최고봉인 백두산에서 절정을 이룬다. 구수산은 조선의 산이란 산이 서남단으로 면면이 내려와 뭉친 곳이며 이 깊고 그윽한 두메산골에서 바닷물과 밀물이 만나는 것이다.
지도를 놓고 보면 구수산은 흡사 모태 중의 태아와 같은 형상이며, 길용리는 구수산에 폭 쌓여 있는 모양의 마을이다. 탯줄처럼 한 줄기 푸른 띠가 법성포로부터 해수(海水)가 구수산 산협을 끼고 굽이굽이 길용리까지 들어와 여기서 밀물과 바닷물이 서로 만나는 곳이 길용리이다.
길용리는 구수산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다. 길용리를 중심으로 하여 구수산 기슭에 장산리, 천정리, 천마리, 홍곡리, 백암리, 대신리, 구수리 등이 있다.
구수산 기슭의 마을에는 머언 옛날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보인다. 백수면 소재지인 천마 1동 모정에 선돌 모양의 9개의 바위가 산재해 있고 장산리와 길용리 노루목 잔등에도 어쩌면 고인돌이거나 선인돌인 듯한 사람의 손에 의해 세워진 바위돌임을 알아볼 수 있다.
옛날 옛적에는 구수산의 상당 부분이 바다에 잠겨 있었던 듯 하다. 길용리 영산선원에 가면 소태산 재세 시 제자(박계축 68세)에게 명하여 옥녀봉에서 지게로 옮겨왔다는 괴석(후에 주산이 이 돌을 수륙 변경 참고지물이라고 명명하였다.)은 조개껍질이 다닥다닥 붙은 퇴화된 바위 돌로서 화단 장식 돌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겨날 수 있는 예라든지, 영광 내륙 깊숙이까지 해수가 드나들었다든지 이러한 이야기를 미루어, 영광 일대의 큰 산들은 모두 바다 가운데 섬이 아니었던가 싶다.
점차적으로 해수가 밀려나가고 서해안의 융기현상이 나타났을 때 길용리 선진포는 제법 큰 구실을 하는 나루터였다. 더군다나 선진포 물 건너 입석리 마을에 사는 고옹들은 「옛날에는 선진포를 법성포라 하였나니라.」말하고 있다. 선진포는 어디까지나 선진포이겠지만 이 입암리라는 마을에 「고법성」이라는 부락이 있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제법 나룻배가 드나들었던 선진포는 지금 아무 쓸모없는 나루터다. 그러듯이 고법성엔 지금 바닷물이라곤 구경도 못하는 부락이지만 몇 천 년 전엔 나룻배가 드나들고 아주 번화한 파시(波市)를 이루던 한 때가 있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구수산 구(九) 암자(庵子)
구수산에는 8만 9암자가 있었다 한다. 실수로 8만 9암자는 사뭇 과장된 표현이다. <팔만(八萬)>이란 인도 말로 많다는 뜻이다.
길용리 주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에 구수산 9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백수면 사람들은 <9>자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면내를 점거하고 있는 구수산이 그것이요, 또 구수산에 하필이면 아흔 아홉 봉우리 아흔 아홉 샘이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요, 풍류와 글을 알고 이름을 짓되 면명을 백(百)에서 일(一)을 뺀 백수면이라 이름한 것이 그것이요, 길용리 노루목을 향한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먹이를 보고 노리고 있다는 구호동 명과 노루목을 향한 구룡바위가 있대서 구암이라 이름한 점들 등등 <9>자를 좋아하는 백성들이 백수면 사람들이요 길용리 주민들이다.
이 <9>자는 <1>을 위한 기다림이며, 10(완전)을 채우기 위한 안타까운 소망의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토록 가난한 구호동 아홉 마리 굶주린 호랑이, 구용암의 아홉 마리 용이 눈을 벌겋게 충혈한 채 노루목을 향하여 앉아 있고, 구수산 99봉 99천이, 구수산 8만 9암자가, 구수산 산천초목이 다 마르도록 병진년 춘 3월 26일 그 날의 노루목을 향하여 안타깝게 기운을 모두 없는지도 모른다.
구수산 9 암자는 대개 길용리 마을에 속하는 절들이다.
길용리는 현재 여러 개의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촌, 범현동, 구호동, 용암, 마계촌(마제촌), 뱀골, 절골, 무남, 수두암, 입석골, 선진포 등의 부락이다.
부락 이름이 뜻하듯이 절골에는 옛날에 큰 절이 있었던 듯 하다. 절골의 큰 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암자가 있었고 지금도 이름만 남아있는 절이 구수사, 수도암, 사자암, 무운암, 가야암, 죽등 등이다.
절골에는 지금도 가로 세로 두 자 이상의 주춧돌이 수십 개나 발견되고 발을 갈 때마다 기와장이 무수히 발견된다. 지금은 절터가 밭이 되었지만 본당 절터 좌우의 대소 전각을 비롯하여 상당히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높이 2.50m, 두께 16cm의 당간지주를 발견하여 하나는 파손되었고 하나는 선원으로 옮겨 보존 중에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에도 구수사라는 절 이름은 발견되나, 읍지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도 이조 인조조(仁祖朝) 무렵에는 폐사가 되었던 것 같다.
절골 구수사에서 북쪽 골짜기에 수두암이라는 부락이 있다.
5가구 정도 밖에 살지 않는 이 산골에 30년 전에 이곳에 들어와 산다는 80객 노인은 큰 수도암 작은 수도암이 있었다며 「우리는 보들(보지를) 않았다.」고 한다. 절터는 동네에서 왼쪽 큰 바위가 서 있는 골짜기에 150평 남짓한 공지가 있고 공지 전면 개울 쪽을 향한 축대에는 펑퍼짐한 바위가 있다. 수도암 뒤, 불목재를 넘어가면 동골 구수리로 가는 골짜기가 나오고 서북쪽 삼밭재(마전령)을 향하여 산등성이를 타면 사자암 지(趾)가 있다. 사자암에서 삼밭재로 넘어가면 고개 길에 마당바위가 있고 그 옆에 속칭 개미절터라는 가야암 지(趾)가 있다.
수두암 부락에서 500m 남짓 골짜기를 내려오면 무남부락이 있다. 무남부락은 절골 구수사로 들어가는 동구에 해당되며 이곳에도 무운암지가 있다. 예전에는 상신 부락이라 하였고 마을 뒷산에 큰 상암 작은 상암이 있었단다.
무남부락 저수지 길을 가다 남쪽을 행하여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입석골이 나온다. 여기 사는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왕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부락에 좀 떨어진 산비탈의 감나무 뒤에 절터가 있는데 기와장이 많이 발견된단다. 또 동네 뒤에 쿵쿵 울리는 땅이 있어 괭이로 파보았더니 옛날이 기와장을 구웠던 기왓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길용리 산골짜기의 여러 부락에는 지금도 기와집은 보기가 어렵다. 더구나 예전의 생활 정도를 미루어 볼 때 기와집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아마도 입석골 기와굴에서 기와를 구워 산내 대소 암자에 수시로 기와를 공급하였던 듯 하다.
입설골에서 남쪽으로 수리봉(속칭 천장봉)과 갓봉 사이로 난 오도재를 40분 남짓 걸어 넘으면 천마리(면 소재지) 나온다. 천마동 이웃 동네가 죽사동인데 동네 뒷산이 구수산을 연한 대절산이다. 산모양이 엄지손가락 같대서 산봉우리 터를 대무악(大拇岳)이라 하는데 여기에 죽사가 있었고 지금도 산죽(山竹)이 무성하다.
이 밖에도 구수산 동서남북에 수 개의 절터가 있다고 하나 일일이 다 답사하지 못하였다. 무성한 잡목과 길을 찾을 수 없는 가시덤불이 골짜기일수록 더 우겨져 도저히 옛 길을 찾기가 어렵거니와 이를 답사하고 고증할 수 있는 자료도 워낙 빈약한 까닭으로 넉넉히 일을 진행하지 못하였다.
삼밭재 개미절이라는 말은 가야암→ 갬→ 개미절터로 움이 변하였고, 무남의 무운암도 무운암→ 문암→ 무남으로 변하였으며, 수도암도 수두암으로 사투리 발음이 된 듯 하다.
이상의 구수사, 무운암, 수도암, 사자암, 가야암 그리고 동서남북 모든 절은 모두 길용리 지역에 있는 절이라는 데 특색이 있으며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 이 중에 한 절도 현존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들 않았지만 절에 빈대가 생겨서 절이 망했다더라.」고 한결같이 이야기 하고 있어 그 구체적인 폐사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만팔 9암자가 구수산 골골이 목탁을 울리며 염불 소리 그치지 않고, 안개처럼 자욱히 향연(香煙)이 산마루에 어렸던 전설의 고향 구수산. 이제 그 옛날 자취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고 아득히 먼 머언 신화 속의 얘기로만 그치고 마는가.
사진· 유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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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호엔 「소태산 대종사 가계와 탄생 전후담」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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