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교당 전봉덕행 고문
남편 병 고치려 굿하다 법신불 신앙 깨쳐
남편 병 고치려 굿하다 법신불 신앙 깨쳐

<사진설명: 전봉덕행 씨>
남편 병 고치려 굿하다 법신불 신앙 깨쳐『내 남은 일생에 두 가지 원이 있는데 이 원을 이룰 수 있도록 법신불게 항상 심고를 올립니다.』고 말문을 연 부산 연산교당의 창립주 석타원 전봉덕행씨.
회갑이 넘은 노인답지 않게 아직도 교당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전」씨의 직책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도회장 역할을 하지만 교당의 발전을 위해 아들인 신제학(47세)에게 회장을 넘겨주었다.
『나야 어차피 교당일 안 하고는 안 되니 회장이 둘 된 폭 아니요.』반문했다.
두 가지 원이란 연산교당의 신축과 연산교당이 연원교당을 내는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심고를 올린다니 집념이 대단하다.
「전」씨는 원기 46년에 입교하여 교당에 나왔으나 사업을 하는 남편은 도저히 입교시킬 수 없자 하루는 『교당 친구들이 당신 보러 집에 온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오면 미안도 하고 번잡스러우니 내가 나가지 하며 남편이 교당에 나왔다. 첫 설교를 듣고 입교한 남편 신성길씨(열반)는 뒤에 초량교당 교도회장을 역임했으며 부산교구 교의회의 전신인 「부산 원지회」(최초는 교도 회장만의 모임) 창립의 산파역을 했고, 초량교당의 운영을 맡기 위해 「삼동 복지회」를 조직하였으며 남자교도 모임인 「원심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도록 남편을 내조했다.
그러나 교당 하나 세우는 것이 원이었던 「전」씨는 원기 61년 일가족 15명을 이끌고 초량교당에서 분리 연산교당을 세웠다. 현재 50여 명이 가족이다.
아들 「신」씨가 교도회장 자부 신덕조(41세)와 딸 신중환(37세)씨는 주무며 시외사촌 노명호씨(50세)는 순교이다.
「전」씨는 6남매를 모두 입교시켜 교당에 나옴은 물론, 교당의 요인역할을 하며 각 가정에 모두 법신불을 봉안하고 집안 의식 모두를 예전에 의해 실시하고 있다. 추석이나 설 같은 큰 명절의식도 식구들이 모두 모여 교당에서 거행하며 손자들까지 전부 참석시킨다.
생활신조를 철저한 「근검절약」정신으로 10원이라도 헛되게 지출하는 일이 없으나 꼭 써야할 때는 아낌없이 쓰고 있다. 특히 인과 이치를 철저히 믿고 어려운 일 당하면 감수하면서 복 지을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복 지을 일을 만들어 하다.
「전」씨는 법신불 신앙의 위력을 증험한 일이 있다. 남편 신씨가 병을 얻자 각종 약과 병원치료도 효험이 없자 최후 수단으로 남편 친구의 권유를 받아 무당에게 갔다. 무당은 굿할 날을 받아 주면 그 안에 여자 손님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굿할 날에 여자교무 두 명이 집을 방문하였는데 무당이 그 일을 어찌 알고 굿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굿은 할 수 없으니 부작이나 하나 써 붙이자고 하여 무당이 글씨를 쓰는데 손이 덜덜 떨리며 글씨가 되어지지 않았다. 「전」씨는 할 수 없이 액자에 넣어져 책상 위에 봉안된 법신불 위에 수건을 덮으며 속으로 「죄송합니다.」했다 한다. 그랬더니 무당은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부작을 써주고 나갔다.
이후 「전」씨는 철저한 법신불 신앙을 하게 되었으며 미신 행위는 한 번도 하여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전」씨의 이러한 신앙의 태도와 생활은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생활 표준이 되고 교당에서는 교도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양산교당 창립 때도 큰 몫을 하였는데 연산교당이 초창 교당으로 발전이 벽에 부딪치면 새 교당 지어 법 동지들이 법회 보는 모습 생각하며 그 날을 기다린다고 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