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석(완(完))

<사진설명: 한정석 학장>
무아봉공
무아봉공은 나를 버리고 공도에 헌신
내가 없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나를 올바르게 알려주는 것
무아봉공이란 나를 버리고 공도에 헌신한다는 뜻이다. 내가 없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나를 올바르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육천 미만의 조그마한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 참다운 나는 이 우주만큼 큰 나가 참 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니라는 것은 곧 무아의 진경은 바로 우주의 나, 세계의 나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아봉공이란 나를 버리고 공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의미에서 참 나를 찾아 제자리에 돌아가는 것이요, 곧 큰 나를 살리는 대아의 실현인 것이다.
일찍이 동서 성자의 성자다움은 조그만한 나를 버리고 큰 나를 찾는 무아봉공에 있었다. 대자대비, 살신성인, 박애 등 몸과 마음을 오로지 일체 생령에게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에 거룩한 성자라고 하는 것이다. 무아 즉 대아, 이것이 나의 진면목이라고 역대 성자들이 가르쳐왔고 특히 후천개벽의 새로운 역사의 문턱에서 대종사님께서는 이 무아 즉 대아의 철학이 절실히 요청됨을 뼈져리게 느끼시고 크게 외치셨던 것이다.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를 찾으라고 성자들이 몇 넌 년 동안 목이 터지라고 외쳤건만 역사의 흐름은 작은 나를 소중한 알 수밖에 없는 환경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현대에 와서는 더욱 이 작은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을 죽이기까지 해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하는 길로 무아봉공 하는 은(恩)의 철학을 대종사님께서는 전개하는 것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오히려 큰 나를 찾는 곳이요, 공을 받든다는 것은 그 공에서 입은 은혜를 이제야 비로소 알아서 갚는다는 것이다.
소아(小我)를 기준으로 할 때 희생이니 봉공이니 말하게 되지만 대아(大我)로 보면 제자리를 찾는 것이요, 참 나의 할 일을 이제야 비로소 하게 되는 것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이 「나」를 사은의 공물이라 하였다. 이미 사은의 공물이니 무아라고 생각함이 당연한 것이요, 봉공이란 은혜를 갚는 것이지 따로히 공도에 헌신하다는 장(壯)함이 아닌 것이다. 대산 종법사님께서는 시방일가 사생일신을 강조하심도 이러한 뜻일 것이다.
현대는 휘황찬란한 과학 문명 시대이다. 앞으로의 세계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과학문명시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과학문명이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면 이에 못지않게 또 하나의 특징은 개인 중심의 세상이다. 그래서 핵가족이라는 현상도 일어났다.
개인주의는 본의는 아닐망정 이기주의를 수반한다. 서로가 이기주의의 입장에 설 때 상생 상화의 사회윤리는 파괴된다. 한 가지 불행 중 다행한 일은 세계의 일각에서는 극악의 이기주의는 자체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희미한 싹이 터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대종사님께서는 무아봉공의 의미를 이타적 대승행이라고 하셨다.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을 버리라고 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을,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고 한다며 약육강식의 수라장이 된다. 또한 자유 방종 하는 행동을 버리라고 하셨다. 한 사람의 자유 방종은 모든 인류를 타락케 한다. 이러한 이기주의를 버리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성심성의를 다하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잘 살게 하는데 성심성의를 다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잘 살아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남을 침해하거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무아봉공의 시작은 자리이타의 윤리에서 이루어진다. 나도 이로우면서 남도 이롭게 되어야 한다. 나의 이로움을 생각하기 전에 남의 이로움에 침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의 이로움을 먼저 생각함에서 참으로 큰 나의 이로움이 돌아오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자기의 생활을 반성해야 된다. 남의 인격과 권한을 침해하지 아니 하였는가. 남의 이로움을 진정한 마음에서 도와주었는가, 남의 불행을 나의 불행과 같이 가슴 아파 하였는가, 조그마한 나의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애를 썼는가, 나와 나의 가족만이 웃고 있는 순간에 처참한 불행에서 허덕이는 동포를 생각하였는가.
무아봉공은 보다 큰 나를 찾는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자기 할 일을 이제야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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