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령교당 이덕원 주무

<사진설명: 이덕원 주무>
가슴속에 맺힌 한 대종사님 법으로 녹이며 생활
모든 사물 범연히 보지 않고 마음속에 대조
시어머님을 처처불상 사사불공 정신으로 모셔
우리 민족엔 「한의 문화」라 불릴 수 있는 특수한 문화현상이 존재하고 있다.
한(恨)을 일반적으로 발생론적으로 특성과 후생적인 특성을 고려할 수 있다. 발생적 특성에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에서 오는 요인은 첫 번째로 역사적으로 잦은 외침과 두 번째는 중세기까지의 정치 체제나 사회 체계에서 온 상처, 셋째 번은 한국인의 특수한 인간관계의 문제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올케와 시누이, 적자와 서자의 관계 등 그 한 가정 내부에서 한국인의 심정을 이즈러뜨릴 만한 인간관계가 존재해왔다. 이 때문에 근원적으로 한국인은 한을 빚는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 특히 한국적 특수한 인간관계로 여자들의 세계에서 발생되는 것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겪는 한이다. 이 관계에서 하급자로 겪는 구박에서 응어리진 그 한(恨)을 녹이며 사는 여인이 바로 마령교당 이덕원 주무(53)다.
「이」주무는 원기 43년 9월 오빠 이현도 교무(해룡농기 교장)의 연원으로 입교, 원불교와 인연을 맺고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恨)을 부처님의 법으로 녹여내고 있다.
『대종사님의 법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시어머님의 고된 구박에 못 견디어 차라리 중이 되겠다고 집을 뛰어나온 것을 이현도 교무(당시 당리교당 재직)가 인과법문으로 설득, 집으로 되돌려보내, 오늘까지 일원상을 믿고 살아왔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교당에서 법회를 보고 집에 갔더니 시어머니가 찹쌀 한 가마를 교당에 다 퍼다 주었다고 억울한 누명을 씌워 내쫓으려 했다. 억울함과 분함이 형용할 수 없이 일었지만, 낮에 조중국 교무님이 하신 말씀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것이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 입술을 깨물며 꾹 참았다. 이렇게 진리에게 맡기고 몸소 실천하는 가우데 집안에 얽혔던 보이지 않는 사슬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려나고 마음도 열리는 것을 느꼈다.
「이」주무는 1927년 4월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사곡에서 출생, 15세에 동면 김지장씨와 결혼,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결혼한 6년 되던 해에 막내 아들을 임신하면서 또 하나의 괴로운 시련이 닥쳤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한 방에서 기거하고 며느리인 「이」주무는 독방으로 쫓겨났다. 그 뿐만 아니라 아들들까지도 빼앗겨 엄마 노릇 한 번 제대로 못했다. 항상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으로 부부의 정과 모자의 사랑을 느껴야 했다. 이런 생활이 30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주무의 이러한 생을 아는 사람은 아무찌기 이웃집 사람밖에 없었다. 시어머니가 일들도 에게 며느리가 도 불효하고 바보라고 소문을 내어 동네에서도 고립된 혼자만의 삶이었다. 그렇다고 「이」주무가 남에게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 할 형편도 못 되었다. 다만 「이」주무의 가슴에 제련소의 용광로처럼 달은 뜨거운 불덩이를 식혀내는 작업으로 부처님의 법에 표준 하여 생활하는 것뿐이며, 소처럼 전답 4천여 평을 혼자 가꾸며 살아왔다.
이러한 생활 중에도 교단 사업에 참여했다. 『정산종사님의 「남북통일이 되면 사업할 곳이 많으니 모아 두어라.」는 말씀 받들어 푼푼이 모아둔 돈 중 10만원을 서울회관 기념비로 내놓으셨습니다.』고 박명음 마령교무가 귀뜸해 준다.
『가장 큰 공부 표준은 모든 업을 쉬게 하는 참는 공부이며 경계마다 우리 법공부로 무시선 무처선 하고 몸소 실천으로 처처불상 사사불공 하는 것으로 생활표준을 삼고 있습니다.』 「이」주무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다.
「박」교무는 「이」주무의 공부에 대해 『시어머님을 부처님 모시듯 하고 모든 경계마다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고 항상 자기 마음과 대조하려는 무서운 적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재 「이」주무는 자녀들을 모두 결혼하여 분가시키고 82세의 시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하고 있다.
<신(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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