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인 <동래교당 교무>

 최근 우리는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강해지기 위하여 조국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기본자산이 부족한 현실 속에 이룩하려는 노력은 남달리 희생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힘은 곧 정신적 자산인 것입니다. 정신적 자산이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종교인만이 가지는 덕목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對神관계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대신관계만이 아니라 대인관계, 대물관계로 어느 곳, 어느 때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돈이 없어도 살 길이 있고, 난경에서 보호 받을 길이, 잘못이 용서를, 죄인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태산대종사는 「믿음(信)은 만사를 이루려할 때 마음을 定하는 원동력이므로 곧 기본자산 중 기본자산이라」(정전 제5장 8조)고 하셨습니다. 역사에 남은 위대한 인물이나 성공한 인물로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이 「믿음」-그것이 대신관계의 신앙이든 대인관계의 신념이든-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모든 윤리관계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못 믿을 세상」이니 「눈감으면 코 베어갈 세상」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속아만 사는 것처럼 말하는데 자기는 남을 속인 일이 없는가? 나만이 남을 믿고 남은 나를 속이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남을 속이고 있는데 남은 나를 믿어 주고 있지나 않는가? 「믿음」에도 맹목적이 아닌 「믿음」이어야겠습니다. 요사이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는 사이비 종교의 믿음이나 의뢰심으로 가득한 믿음은 바로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대신관계에서는 「진리에 바탕한 믿음」이어야 할 것이며 대인관계에서는 「믿음을 받고 믿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남을 믿어주는데도 남은 나를 믿어주지 않거나 남은 나를 믿어주는데 나는 믿음을 받을 일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이 관계는 언제인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진리에 바탕한 믿음」은 나무가 땅을 만나는 것 같아 수직의 힘이 되고 내가 남을 믿고 남이 나를 믿어주는 것은 나무의 지주와 같아 수평의 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직과 수평의 힘이 만나는 힘의 중간에 내가 있게 되므로 상하, 좌우, 어느 곳, 어느 때에도 튼튼하게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이런 관계를 「자력은 타력의 근본이요, 타력은 자력의 근본이 되어 서로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자신할만한 타력을 만나면 나무뿌리가 땅을 만남과 같다」<정전 제9장 심고와 기도>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본자산이 되는 믿음을 이 땅위에 심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지만 남을 믿어주고 내가 믿음 받는 행동으로 살아 우리의 양심에서 명령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으며 사물하나를 접할 때에도 내가 은혜를 베풀어줌으로써 믿음의 관계는 맺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믿음이 건너는 속에는 나의 하나뿐인 생명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웃 모두가 자기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의 관계가 될 때 우리는 사랑 속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며 은혜는 더욱 은혜를 낳아 한량없는 은혜의 낙원이 이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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