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見과 八正道
교육 강화로 판단력 배양
부정과 불의는 曲見에서

 일원세계의 건설, 인간양심의 거울, 이해 봉사의 풍토를 교시로 삼고 대각개교60돌을 맞이한 원불교에 의하면 많은 교도들이 지역사회 발전에 모범활동을 전개하여 일선교화에 심혈을 경주하면서 국민의 정신전력 강화에 공헌하고 있는 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교육현장에서 또한 일상생활에서 모든 것을 보는데 正見과 善見이 있고 誤見 曲見을 합하여 四見이라한다.
 첫째, 오견…닭이 하품을 하였다고 귀머거리가 말한다는 말이 있다. 닭은 꼬꼬오라고 울었지만 귀머거리에겐 입을 연 것만 보이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오견은 귀가 들리지 않는 데서 온 것이다. 이러한 잘못은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사실이다. 원래 우매하여 사물판단이 부정확한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사리와 사물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기위해 우매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학문이 필요하고 공부가 중요하고 지혜를 닦을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태공이 말하기를 「人生이 不學이면 如冥冥夜行이라」하였다. 이제 우리는 교육력의 강화로 광명정대한 판단력을 배양할 때라고 생각된다.
 둘째, 곡견…사물을 비뚫어지게 보는 것은 어디서 유래되는 것일까? 이는 자기의 마음이 비뚫어졌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바르면 모든 사물을 본대로의 모습으로 비춰주지만 거울이 밝지 못하면 사물을 제대로 비춰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과학이 발달되고 지식수준이 높아진 오늘날이라 옛날에 비해서 오견은 적겠으나 부정과 불의 등은 현대인의 곡견에서 그 까닭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셋째, 정견…곡견에서 부정, 불의에 대한 현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물을 바로 보는 정견이 아쉽다.
 넷째, 선견…우리 인간사회에서는 바른 일에 궁색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정론 정의하고 하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완고해 지거나 편협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정직한 사람, 진실한 사람이 인정을 받으면서도 용통성이 없다고 해서 소외되는 수가 있다. 정론 정직 외에는 일보도 양보하지 않는 아들이 아버지가 나쁜 짓을 하였다고 해서 경찰에 고소해서는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는 수가 많다. 춥다고 하는데 한난계를 꺼내서 한서의 도수를 재는 식의 정직은 가슴막힐 일이다. 그 한도의 그 여유를 보는 마음 이것이 선견이요, 선견은 성자의 자안이다. 공자는 君子不器이라는 말을 했다. 우리 인류사회에서는 선견으로써만이 이해와 양보와 화합(理知, 事和)이 있는 부드러운 사회가 이룩된 것이고 국민의 총화도 서로의 선견에서 사회정화에 나서야 한다. 다음은 팔정도를 우리 생활에 수행 실천함을 강조한다. 종교가 하나의 인간교육을 목적으로 한다면 불교의 팔정도는 모든 인간의 수행덕목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의 내용은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念, 正定, 正命, 正精進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 국가생활에서 선견과 팔정도의 정신으로 精進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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