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응철 교무

<사진설명: 장응철 교무>
투쟁의 관계는 폭력과 원한
강약 대립은 충격적 사회유발
만유의 순환하는 이치 알아야
현대사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는 집단 사회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문제와 시류에 의하여 생기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래가면 사회의 병리현상으로 나타난다. 오늘날의 현실은 문제의 도를 지나서 병리이상으로 굳어져 있다는 것은 일반화된 사실이다.
사회는 개이니 모여서 소집단을 형성하고 소집단들이 이해득실에 따라서 연대관계에 의하여 계층이 형성된다. 이러한 모임 현상의 내면에는 세력이라는 응집체(정신적이든 물량적이든)가 있어 개인이나 또는 집단계층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약한 경우도 있다.
이 강과 약은 원하든지 원치 안든지 간에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산다. 이 관계에 있어서 자유 권리 이윤 등을 분배하는 일을 중심으로 관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분배과정에서 강과 약의 심리적 내지 제도적인 측면서 투쟁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가 오늘의 사회현상이다.
이러한 투쟁의 관계는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과 착취로써 불공정한 분배를 하고 이에 대하여 약자는 강자에 대하여 깊은 원한과 반발로 맞서게 된다. 이러한 상극은 이리와 이리의 쟁투의 관계를 맺고 사회가 갈등과 대립 속에 충격적인 사회변동을 하게 됨으로 사회는 병들어 있는 것이다. 그 병은 불안과 불신풍조 방어적인 이기주의 무도덕적인 배금주의 쾌락적인 퇴폐현상, 파괴적인 테러의 형태 등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비극적인 역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강자와 약자 간에 감사의 관계로 전환하여서 강약이 상호간에 상생의 진화관계를 맺음으로써 안정과 발전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등의 원리이며 평화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약의 평등윤리를 또는 분배의 공정윤리를 제시하신 법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봉건군주사회 시대는 강자들은 차별제도로 약자를 억압 착취하여 왔으므로 많은 시민혁명과 민란 등으로 약자는 맞서왔다. 봉건사회의 붕괴는 자본주의 국가가 형성되었고 자본주의는 다시 자본주와 근로자의 그 이윤의 분배문제에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갈등의 역현상으로 인하여 전체주의로 발전한 국가가 생기고 뜻있는 이들의 인권운동으로 확산되고 있으나 자본주의가 바탕이 되고 있는 지나친 냉철한 합리정신이나 전체주의가 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득력주의 현상 또는 초강대국의 발전현상은 미래를 대단히 불안하게 하고 있다. 또 자원의 강자와 약자, 기술의 강자와 약자 등은 새로운 관계의 정립이 아니면 장차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개인과 개인끼리 지역사회와 지역사회끼리 지도계층과 시민계층사이에 상극적인 싸움일보 전의 눈 흘김의 비극적인 관계를 계속 하여서야 될 것인가?
강자와 약자가 단절된 관계에서 우리의 관계는 서로가 모두 성공하는 관계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을 사는 역사의식을 갖는 모든 사람들의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다.
대종사님께서는 사적인 관계 즉 강약진화의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강자가 약자에게 자리이타의 도로써 약자를 보호 육성함으로써 영원한 강으로 진화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강자가 부적당한 강이 되어서는 그 강한 세력은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적정한 이윤추구의 적법한 권리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겸손한 자유의 향유 등 부끄럽지 않은 강자가 되어야 한다. 공익정신과 약자에게 고르게 분배시키고 그러한 음덕이 되어야 한다. 강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세력의 매개체는 본질적으로 만유의 공물인 것으로 그것은 늘 순화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러한 분배의 윤리를 모르고 강의 독점을 고집하면 급격한 쇠약을 불러오게 된다는 것을 주변을 살펴보며 늘 느끼고 있는 사실이다. 또 다음은 약자가 강자에게 생각 없이 반항할 것이 아니라, 강자를 선도자 즉 성공의 모델로 삼고 강이 되도록 땀 흘리고 축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약은 고정 불변한 것은 절대 아니다. 변화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강으로 변화하도록 온화한 순종의 자세로 임하여야 한다. 사회의 모든 강자가 강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교과서적인 원리가 있을 것이다. 그 원리를 체득 전수하여야 한다.
폭력과 반항으로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은 미시적인 착각이며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그것은 오히려 공포와 불의의 불씨가 될 것이다. 우리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은(恩)적인 관계로 전화시켜야 된다는 숙제를 가지고 있다.
<서울사무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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