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뜻을 굽어보소서
칠십 문턱에서
지도인으로 마음에 미움이 없사옵니까
갖추지 못한 인격 후진에 부끄럽습니다

 더럭! 겁이 납니다. 이제 제 나이가 68. 70문턱입니다. 백세면 어떠하고 만세인들 탓할 바 아니나 선현의 법어에 「破車不行 老人不修」라 하시었고 또 세속의 격언에 「모테만 타 버리고 고기는 설었다」는 말처럼 저의 공부는 아직도 천리인데 제 나이가 벌써 70문턱이니 말입니다. 원기41년 병신6월 13일 제가 마령교당 교무로 엄명되었을 때 인사차조실에 알현케 되었지요. 정산종법사님의 인자하신 모습 만면희색이시었는데 순간! 팔만사천의 번뇌가 말끔히 가셔졌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자비방편이시요, 만능만덕인가 했습니다. 때에 종법사님 법문을 내리시니 『준곡은 이번에 마령 가서 두 가지 공부가 있으니 하나는 마음을 비워 해탈함이 첫째 조건이요, 둘은 남을 미워하지 아니함이니 지도인의 급선무의 조건이니라』하셨지요.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짧은 분부였으나 저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귀중하고 값진 보물이라 거룩하고 감격한 생각으로 20여년을 생명처럼 여기며 조석에는 심고로써 다지고 깨우며 일상생활에는 신조로 염념불망 금일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반조하니 아직도 요원하기만 합니다. 또 하나 반성할 바가 있사옵니다. 이 회상과 나의 위치에 대한 일이옵니다. 어느 동지의 설교예화에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 안에서 선객 한 사람이 실수하여 물에 빠졌다면 그 피해는 그 한 사람의 희생으로 끝이나나 그 배의 선장이나 기관장이 실수가 있는 경우에는 그 피해는 전 선객의 생명이 위험한 것과 같이 우리 교단도 평교도 한사람의 실수라면 그 사람에 그치지만 교단의 간부나 교당 요인의 실수는 그 피해가 교단이나 교당에 파급된다』했습니다. 나의 존재는 이 회상의 선장격도 아니요, 또는 기관장격도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선장이나 기관장의 책임을 느낄 경우도 있으니 교도나 후진들이 나의 무능도 아랑곳없이 과분하게 대해주고 엉뚱하게 책임까지 져야할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실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소중하고 정신 차려야함을 느끼게 되오니 진실로 겁이 납니다. 그런데 마음을 돌리고 다시 앞을 보며 생각하니 그 전부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회상의 전망은 양양한데 회상에 몸을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겁이 나는 것은 공부가 안되어서지 공부를 쉬고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공부하려는 불타는 마음은 古如是今如是하여 如如自然躍動합니다. 제 비록 공부는 안된다하나 정도는 걷고 있으니 정도의 종점에는 見性成佛의 대 목표이므로 즐거움이 넘쳐흐릅니다. 이에 저에게는 태산 같고 하해 같은 책임이 주어져 있음을 압니다. 회상이 넓은 만큼 일거리도 다양하고 이 회상은 움직이는 회상이요, 공부하는 회상이요, 일하는 회상이므로 저의 일거리는 동분서주 쉴 사이가 없사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열심히 일하려는 것이 저의 원이요, 사명이오니 永天永地 無量劫 不退轉을 다짐하며 서원하옵니다. 「마음은 영부님께 바치옵고(獻心靈父) 이 몸은 중생에게 허락하며(許身衆生) 공덕은 이 회상에 돌리리라(反攻會上)」
껍질을 벗지 못하고
소승적 마음이나 소승행은 없사옵니까
교단의 기둥들인 후진을 책임져야지요
박은국 <원남교당 교무>
 또 한해가 저물었습니다. 병진년을 보내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대종사님 성령 전에 참회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아니 매일같이 반성하고 참회하며 몸부림쳐 기도하고 소망하건만 지금까지도 대 근기를 얻지 못하고 졸렬한 기지와 옹졸한 사상으로 하루하루의 생활을 되풀이하는 자신을 생각하면 대종사님 성령 전에 한없이 송구하고 죄스러운 마음 부릴 곳이 없습니다. 영생을 통하여 얼마나 닦지 못하고 짓지 못하였으면 수도생활 수 십 년에 껍질을 벗지 못하고 툭 트이지 못합니까? 더욱이 금년은 보은하는 해로 자신점검에는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부조리 투성이임을 크게 한하면서 참회하옵니다. 나만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고 진행한 일은 없었습니까? 주위의 이해와 호응이 없으면 맥도가 내려가고 기백이 침울해지며 망념을 끓이며 원망하던 일은 없었습니까? 법이 없고 도가 없는 사람을 보면 멀리   방치해버리는 타성으로 살지는 않았습니까? 무관사에 동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내가 계획하는 일 외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살지는 않았습니까? 넓고 크고 언대한 경륜에는 아예 뜻을 갖지 않는 소극적인 소승심리나 소승행은 없었습니까? 한없이 부끄럽고 미운 자신이지만 큰  일을 해보겠다고 서원 올리었으며 영생을 통하여 불보살 되기로 신명을 바쳤으므로 그 뜻을 다시 새겨 대종사님 성령 전에 엎디어 참회하옵니다. 대종사님이시여! 定力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寂寂惺惺한 정력삼매에 들게 하시옵고 마음에 자유자재의 힘을 얻게 하시옵고 영성이 모든 경계 앞에 비추어서 모든 일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大智光이 허공밖에 솟게 하시옵고 솟아나는 무위의 법열이 주위에 환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시옵고 덕성이 모든 인연 앞에 나타나서 何人을 대하든지 화기애애한 심법을 베풀게 하시옵고 이 경륜이 우주에 통하고 사랑이 만유에 비치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호소하고 참회하며 기도하고 또 호소하옵니다. 대종사님이 제자 이 못난이를 키우시기에 얼마나 아쉬워하십니까? 이렇게 참회하며 정진을 다짐하옵니다. 대종사님이시여! 날로 발전하는 교단의 기둥들이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 자라나는 우리 교단의 기둥들인 후진들이 외향으로만 돌진하지는 않습니까? 信을 생명으로 하는 우리 신앙인들로서 신심을 여의고 공을 위해 출가한 교역자로서 공심을 상실한 후진은 없사옵니까? 우리 후진들을 보살피고 관심 가지는 선배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 후진들에게 더욱 안으로 실력을 쌓아 밖에서 천만경계의 어려움이 닥쳐도 이 장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어야겠사오며 자기의 조그마한 지식이나 기술에 매여 본말을 잃지 않게 관심을 가져주어야겠사오며 심신 공심으로 모든 생활을 표준 잡아가게 마음의 기둥을 만들어 주어야겠사옵니다. 그러나 마음의 기둥에 매여서 한 발자욱도 못 움직이는 바보후진을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대종사님이시여!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 참회의 글이 나를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내 이웃의 아픔에 얼마나 아픔을 했고
서원을 실행할 능력은 얼마나 됩니까
한희윤 <원광대 대학원생>
 『대종사님의 뜻을 받드는 훌륭한 전무출신이 되겠습니다』고 서약을 올린지도 결코 짧지 아니한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제금 모둔 마음으로 대종사님께 저를 고하려 하오니 갈고 닦는다고 했던 지난날들이 근기의 하렬함과 정성의 부족됨만이 크게 드러나 부끄럽고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몇 가지를 들어 생각하며 참회하옵니다. 첫째, 대종사님께서 천명하여주신 일원의 진리에 바탕한 지도이념이 수립되지 못했습니다. 1976년도는 세계적으로 큼직큼직한 사건들로 가득가득 메워졌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 중공수뇌들의 권력다툼, 브레즈네프의 뻔질난 동부유럽 방문 등 정치돌풍 속에 비아프라의 기아현상, 중국 당산시의 대지진으로 초토화, 가난한 동해의 어부들이 3백여명이나 수장을 당했습니다. 태동을 위해 겪는 세계의 진통과 어두운 그늘에서 오그라들어 사그라져 버린 나의 주위를 보고 저는 얼마나 局트인 안목으로 임할 수 있었던가. 원불교의 일원사상에 바탕하여 수립된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던가하고 생각할 때 스스로 부족 됨을 느낍니다. 둘째, 종단의 방향과 저의 생활이 일치하도록 하는 노력이 적었음을 후회합니다. 대종사님께서 회상을 펴실 제 바쳤던 선진님들의 신성을 생각해 봅니다. 이제 종법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교단의 방향에 대해서 얼마나 한 긴장감을 가지고 실천하고자 해보았던가. 법치교단이라고 할 만한 교헌개정이었던가, 세계종교 유엔 기구를 위한 준비의 태도는 가졌던가, 서울을 비롯 각 교구의 대법회에서 내려주신 법설을 실천해 보고자 하는 발돋움은 있었던가, 교도사업성적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으며 훈련원 강화에 대한 교단의 방침에는 어떻게 임했던가. 교단의 방향과 일치하도록 하는 사무치는 정성이 적었음을 느꼈습니다. 셋째, 뜻은 품었으나 그를 전할 능력을 갖추는 데 소홀했던 점입니다. 새 시대의 도래와 함께 대종사님께선 종교통합을 기도하셨고 강대국과 약소국이 공존하는 낙원세계를 이룩하고자 하시었습니다. 그 뜻을 받드는 것이 전무출신의 사명이오나 오관이 멀쩡한데도 어느 것 하나 제 구실 하기에는 미숙하고 빈약하기만 합니다. 이 미숙하고 빈약함을 극복할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노력이 부족했고 오히려 현상유지에 만족을 느끼는 안일과 답습에 그친 진부한 태도였음을 느끼옵니다. 넷째,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고의 자세가 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구차한 합리화, 친불친으로 인한 편협성, 타 종단에 대한 독선적인 우월감, 잘 되어 갈거라는 부정확한 확신 등등 그에 따르는 편견들에 꽉 붙들려 있습니다. 이런 주관적이고 감정적이고 맹목적인 편견을 원불교의 젊은 일꾼이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 참기 힘든 수치를 느낍니다. 부족 됨이 많기에 그에 따르는 후회도 적지 않습니다만 이를 반성하고 다시 노력함으로써 크옵신 은혜에 보답하는 전무출신으로서 사명을 다하고자 합니다.
더 슬기롭지 못하여
정성과 역량부족으로 저지른 어리석음
두루 살피나 역사적 과오는 없사옵니까
이광정 <교화부장>
 우러러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뿌듯이 그저 소중하고 그저 거룩하기만 한 대종사님! 그리고 전만고후만고의 대원만 교법……. 어쩌다 이토록 거룩한 회상에 참예하여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공부 길을 바로 찾아 영생을 구원 받을 수 있었는지 아슬아슬하고 천행만행의 설레임을 억제할 길 없나이다. 나아가 이토록 거룩하신 대종사님과 대 법, 대 회상을 받들며 공부하고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은 저의 宿劫多生의 소망이요, 꿈이 드디어 이 땅 이곳에서 이루어졌나이다. 더욱이 남 먼저 참예하여 대 회상 창립사에 미력이나마 바칠 수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대견한 긍지도 잠깐 가져보옵니다. 그러하오나 끼쳐주신 거룩함과 홍은을 생각하며 제가 거닐 어온 길을 돌이켜 보고 그동안 이룩하여 놓은 결과를 반성하면 성령 전에 엎드려 통회함을 금치 못하나이다. 대종사님 성령이시여. 호된 꾸중과 아픈 매를 주시옵소서. 더 정성하지 못하고 더 슬기롭지 못하고 더 열심 하지 못하고 더 큰 만능만덕을 갖추지 못하고 수없이 잘 못한 것들을 한데 묶어 엄한 꾸중과 채찍을 주시옵소서. 한 묶음 달호(매)를 준비하여 성령 전에 바치고 종아리를 걷나이다. 그리고 모든 잘못들을 낱낱이 들추어 피맺힌 고백을 하나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진리의 길을 사실 그대로 대낮처럼 휘황하게 밝혀주셨고 신앙과 수행, 인도와 수도의 길을 보다 탄탄하고 보다 빠르고 보다 넓게 다듬어 주셨나이다. 또는 판탕한 시국을 당하였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 하사 평지조산을 하셨고 교단만대의 기초를 굽이굽이 다져 주시고 바른 방향로를 태양처럼 밝게 밝혀 주셨나이다. 이토록 거룩하심을 끼쳐주신 대 회상에서 제가 이룩한 수행과 봉직 공덕은 그 무엇이며 정성과 역량과 건강이 부족하고 어리석음과 졸견으로 저지른 잘못들은 이 어이 다 사죄 하오리까. 아직도 저의 무지로 인하여 깨닫지 못하는 역사적 과오는 없는지 그저 신경을 곤두세우고 최선을 다 하오나 해도 해도 오직 미흡하고 부족할 뿐이옵나이다. 속연을 여의고 회상의 품에 안긴지 어언 24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변하고 또 변하고 다시 또 시작하는 해가 지나갔으며 불혹의 문턱도 넘어선 41세……. 위로 받들고 아래로 이끌면서 대기대용의 대 경륜을 종횡무진하게 구사할 나이! 생각하면 모두가 미흡하고 유감 뿐으로서 그 낱낱을 다 들 수 없나이다. 더욱이 대 회상 창립기에 교화행정 실무의 총책까지 봉직하게 되어 오직 송구하고 저의 모든 부족이 뼈아프도록 저려옵니다. 대종사님 성령이시여, 법신불 사은이시여, 대자대비로 용서하여 주시옵고 크게 깨우쳐 이끌어주시옵소서. 저와 저희 모두는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고자 하오니 이 거룩한 일원대도로 유감없이 신앙할 수 있는 슬기와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망치의 울림 한 번도 없이
타락된 영혼이라도 천사의 사실
쓸고 닦아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박성기 <로스엔젤리스 교무>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시간의 영원한 순환 속에 태양은 무한히 솟고 무한히 기울었습니다. 成住壞空의 순화과정은 영원히 되풀이되는 우주호흡입니다. 저 무한의 태양도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이 우주의 호흡에 흡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과 낮이란 하루의 흐홉이 모이고 모여서 춘하추동이란 일 년의 호흡을 이룹니다. 풀벌레의 호흡과 나무 한 잎의 호흡이 모이고 모여서 우주의 호흡이 되는가 봅니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조용한 이 시간에 좀 더 큰 우주의 호흡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산중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의 잎 끝에서 이 큰 우주의 호흡 소리를 만났으면 합니다. 우리 생령의 마음하늘에도 태양이 솟고 지고합니다. 61년 전 대종사님께서는 이 뭇 생령의 마음하늘위에 소리 없이 한 둥근 태양을 순산하셨습니다. 새 광명이 동녘하늘에 솟으며 잠든 영혼들을 깨워 주셨습니다. 빛이 없는 세상에 빛을 주셨으며 등불이 없는 세상에 한 등불을 밝혀 주셨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야 하는 중생들에게 앞길을 밝혀주는 횃불이었으며 이 횃불은 쉬지 않고 삼천리 방방곡곡에 밝혀져 왔습니다. 아홉 사람의 대열이 60만의 대열로 뭉쳐지고 더욱 큰 횃불이 더욱 높이 켜지고 있습니다. 횃불을 전하는 빛의 사조들이 멀리 서구에까지 보내졌습니다. 새 광명의 혁명은 조용히 역사의 선두와 후미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는 대각의 울림을 천지에 진동시키는 대공사가 이제 회갑을 보내게 됩니다. 이제 우리 교단은 수 만년을 비출 수 있는 승화된 시간의 결정체를 조각하는 엄숙한 역사의 산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역자는 시간을 조각하는 예술가입니다. 초의 백만분의 일까지도 조각할 수 있는 시간을 조각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습니다. 아무리 타락된 영혼이라도 천사를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기적의 산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대종사님! 성령 앞에 조용히 뼈아픈 참회를 울립니다. 시인이 원고지를 마구 허비하듯 시간을 조각해야 할 저는 조각사가 갖추어야할 장구도 없이 긴장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숱한 시간위에 망치의 울림 한 번도 없이 멍한 허송을 했습니다. 시간을 쪼개고 가다듬고 연마해야 할 시간의 조각사가 시간을 잊고 꿈의 환상과 리듬의 환상 속에서 자아를 상실했습니다. 조각의 망치로 명치를 치면서 잠든 영혼을 일깨워야겠습니다. 이제 밀려오는 백지의 시간 위에는 점의 정성이 선이 되고 다시 원을 그리도록 본래의 조각의자세로 환원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를 둘러싸고 있는 조각의 작업장을 둘러보아야겠습니다. 태아를 분만할 산실이 청결한 무균의 산실이여야 하듯이 새 역사를 출산할 역사의 산실인 우리의 작업장인 이 교단이 청결한 무균의 산실인지? 어느 곳이 썩고 부패했는지? 불결한 역사의 산실이 되지 않도록 치우고 닦아야 할 곳을 찾아내야겠습니다. 61년 전 대종사님께서 만들어 주신 지극히 맑고 지극히 정성어린 만생령의 산실을 지키는 한 파수가 되도록 참회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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