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의 봉사 ⑤
제생의세의 목적 실현
근원적 진리 제시하고 포용적 긍적 자세 수반
정의운동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이 정의운동은 정치와 불가분의 양수관계에 있음으로써 이를 올바로 추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문에서 추진하는 정의운동은 바로 정치 그 자체는 아니다.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향도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기는 하나 정치와 운명을 같이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정치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넘어서면서 정치를 향도해야 할 종교문에 있어서 정의운동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분인 「폴 틸히」는 『정치적 이념이 무한한 궁극적 존재(Ultimate Being)를 향해 끊임없이 지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라 말하였다. 정치적 이념이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종국적으로 유한한 인간적 사실에 귀착된다면 그것은 결국 더 발전할 수 없는 벽에 부딪쳐 타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종교문의 정의운동에는 궁극적 존재, 즉 우주의 근원적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다가서려는 기본적인 자세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 자세를 놓아버린다면 이미 그것은 종교문의 정의운동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현실에는 복잡다단한 사회강조와 가지가지의 인간심리가 반영됨으로써 그와 밀접히 관련되는 정의운동도 역사상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정의운동의 형태를 분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으나 여기에서는 편의상 ㄱ. 긍정적 정의운동 ㄴ. 부정적 정의운동 ㄷ. 중도적(원변증법적) 정의운동의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기로 한다.
 ㄱ. 긍정적 정의운동 : 이는 정치권력이 인심, 곧 국민의 진정한 소망과 천심, 곧 사회현실에 바탕 한 인도정의를 옳게 파악하고 이를 실현할 줄 아는 예지를 가질 때 있을 수 있는 정의운동이다. 즉 정치권력이 제시하는 비전을 긍정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모든 정의세력을 동원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대체로 종교문의 정의운동은 표면에 나타나지 아니하며 그 이면에서 줄기차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이면에서 작용되어야할 종교의 역할은 첫째, 정치권력자의 비전이 흐려지지 않고 계속 새로워지도록 뒷받침하는 일이며 둘째, 정치권력이 금력이나 폭력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도록 진리의 힘을 모아 주는 일이다. 이러한 좋은 본보기가 링컨의 노예해방운동에 따르는 미국 종교인들의 줄기 찬 지지와 성원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종교인들은 잔인하고 혹독한 노예소유자들의 손에서 신음하는 흑인들을 돕기 위하여 여러 가지 위협을 무릅쓰면서 한편으로는 흑인들에게 용기와 자각을 불러 일으켰고 또 한편으로는 노예소유자 사이에 인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진력했던 것이다. 이들의 숨은 노력의 결정이 노예해방운동의 위대한 결실을 맺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음을 말할 나위가 없다. 
 ㄴ. 부정적 정의운동 : 이는 정치권력이 인심과 천심을 저버리고 자행자지하는 때에 일어나는 정의운동이다. 즉 정치권력의 부정과 부패를 규탄하고 이를 바로 잡는 데 모든 정의의 노력을 동원하는 운동이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정의운동은 대체로 이 부정적 정의운동의 양상을 띄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이 부정적 정의운동에는 언제나 정치권력과의 마찰이 전제됨으로써 수다한 의생이 수반되었고, 그 때마다 종교는 모든 정의세력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좋은 본보기를 히틀러 정권에 대항한 반나치스 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게르만 민족의 세계지배화란 독단적 광신에 사로잡힌 나치스정권이 유태민족을 가스탱크 안에 몰아넣고 집단학살을 감행하는 등 그들의 횡포와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횡포와 만행을 규탄하여 일어 선 정의의 투사들이 줄기차게 저항운동을 계속하던 중, 사뭇 악랄해진 그들의 탄압 앞에 지식인, 언론인들이 하나하나 굴복해 갔으나, 목숨을 걸고 끝까지 저항운동을 계속했던 대다수의 투사는 종교인들이었던 것이다. 종교인들은 근원적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향해 자기를 던짐으로써 생사를 초월하는 정의운동의 최후 보루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ㄷ. 중도적 정의운동 : 이는 정치권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겸용하는 운동으로서 오늘날과 같이 날로 복잡해 가는 정치구조 속에서 더욱 요청되는 새로운 형태의 정의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이란 항상 대긍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부정적 정의운동은 항상 근원적 진리에 향하는 대긍정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정하는 소이는 근원적 진리에서 이탈해 가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이오, 부정을 위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 정의운동의 투사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는 바로 대긍정을 위한 부정임을 망각하고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 치닫는 점이었다. 더욱이 종교적 진리에는 언제나 인애와 자비란 포용적 긍정자세가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니, 종교문의 정의운동에서는 일단 정치 권력자들에게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여 신장시켜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경우의 긍정이 추호도 종교적 근원적 진리의 엄연함을 떠나는 아첨으로 타락해서는 결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요건이다.
차례
① 개교 반백년을 넘어서서
② 행정체제의 확립
③ 생산구조의 확장
④ 입체적 교화의 실현
⑤ 인재양성의 다양화
⑥ 사회에의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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