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냐 물질이냐
왜 귀족적 교화라는 말이 나오는가
한국 속의 교단을 인식하는 슬기를
받고만 있는 교당에서 주기만 하는 교당으로

 종교가 인류역사를 통해 정치적으로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끼친 영향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원시 농경사회가 설립되기 전 강변과 상류, 하류를 중심하여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원시인간들은 창조적 생명성을 지니고 자연 환경과 싸워가며 무한한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고행하여 오던 중 인류의 조상들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인 무형의 대상을 향해 두려움에 신뢰하여 종교라는 역사를 창조했고 인간의 창조적 의지가 자연의 환경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가운데 문화라는 생활양식을 남겨줌으로써 된 문화의 개념은 어렵고 다양하기만 하다. 원불교 문호란 있는 것이냐 아니면 없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왜 문화의 발생학적 입장에서 간략히 서술하게 되었는가를 말하고자한다. 원불교도 종교 집단으로서 미래를 향해 책임 있게 역사의식을 지니고 엘리트적 사고로서 의미 있는 사상과 철학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뜻에서이다. 사회적으로 1970년대를 맞이하여 격동의 시대를 겪고는 있지만 세기적 역사는 없었다고 하며 교단적으로 원기60년대를 넘어 도약적인 70년대를 맞이하여 격동의 시대를 겪고는 있지만 세기적 역사는 없었다고 하며 교단적으로 원기60년대를 넘어 도약적인 70년대를 바라보며 교단 반백년사를 회고하면 혹시나 막연한 기대감은 없는지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문제 있는 역사의식은 오늘의 생활여건의 향상이며 진보와 발전을 뜻한다. 이때 향상과 진보발전의 원동력의 주체는 누구인가? 분명히 「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발전과 향상의 주체는 누군가? 나아닌 다른 「남」일 것이다. 과연 나는 남을 얼마나 이해하고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게 열려져 있는가? 한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에서 교단은 진정코 한국을 폭넓게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말인가? 문화는 창조성은 있으나 독자성은 없다고 본다. 언제나 문화는 복합적인 것이지 순수한 의미에서 독자적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 다고 볼 때 우리는 내 것 또는 이것만이 제일이라는 편견과 아집을 벗어버리고 대중 속에서 사회 속에서 같이 움직이고 노력하면서 약한 자, 없는 자, 버림받은 자, 병자를 위해 서로같이 고민하는 그래서 이 시대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야 만이 원불교 개교이념을 힘 있게 실천하는 역군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싶다. 청년 대종사는 60년 전 궁촌에서 힘없는 자에 힘을 주었고 방황하는 자에 바른 길을 정해 주신 사실을 상상해본다. 일본 식민지하에 있어서의 민족의 역사는 정체되었고 역사가 중단된 상황 속에 무슨 문화의식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교단60년사를 통해 과연 청년 대종사의 산 역사는 생동성 있게 서서 파급시키는데 창립정신을 통해 엄숙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산업속의 교단 발전은 정신적 이념의 행위였던가, 물량적 사업위주였던가? 여기에는 정신과 물량이 병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문화의식의 근원이 되는 종교의 역할이 추상적인 이념의 고고성도 아니고 물량적 경쟁심도 아닌 한 사회가 무슨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나의 주변이 하나하나 변화되어 갈 수 있도록 일하는 교단이 되었는가? 말이다. 받고만 있는 교당에서 對사회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실적 있게 주는 교당과 교단이 되자는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평등한 사회로 전환케 하는 계기는 정신이나 물질, 육신 할 것 없이 베푸는 것이다. 우리들 입에서 왜 귀족적 교화라는 말이 나오는가? 무섭고 두려운 패륜의 단어이며 9인 선진님의 정신도 아니며 더구나 대종사님의 뜻도 아니다. 역사의식 없이 내뱉는 말들, 의미 없이 말하는 낱말들이 주변에는 너무 많다. 안방교화, 여성교화, 인정교화, 남성부재 이것들이 정말 그러한 것들이 사실이라면 젊음은 슬퍼지고 만다. 다음은 원불교의 세계성 문제다. 한국에서부터 시작하여 혹독한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한 번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성장한 교단은 그동안 미국을 위시한 몇몇 외국에 교화활동을 알차게 진행하는 과정에 있어 더욱 염려되는 것은 교단이 한국문화사에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일원주의나 삼동윤리의 이념적인 구호보다 이러한 이념이 현 단계에서 한국이라는 입지 조건에서 안일하게 실현되리라고 믿고 싶은가? 대운이란 노력하는 자의 영광된 월계관일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전통적 민족문화에 과감한 도전과 창조적 매스를 가해야 현 사회에서 공인받을 수 있는 토착화의 작업이 시급하다고 본다. 토착화에 대한 의아심과 반론이 있을 줄 안다. 클렉크혼이 말하는 『문화란 일단의 사람들이 지닌 특징적 생활양식이다』라는 의미에서 볼 때 한 문화의 성립과정이 시간을 통해 자연적 환경과 융합함으로써 토착화 된다면 토착화 문제는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원불교 문화의 존재유무를 논하기보다 역사라는 시간상에서 원불교적 타입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과거지향적인 전통적 자기 고착과 미래 지향적인 이념화의 실현을 위해 도전하는 양극화에 고민해야 하며 문화라는  공간적 상황에서 원불교적 타입의 표현은 교단이 밖으로부터의 도전과 안으로부터의 도전에서 고민함으로써 원불교의 문화형성 작업은 진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이 흐르는 순간에도 각자가 새 문화를 창조하고 있으며 어디에서나 쉬지 않고 원불교 문화는 형성되고 있음을 무섭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경계하고 싶은 퇴폐적 사고방식과 제도는 교단의 역사를 패하고 새 창조적 문화를 막는 처사가 되므로 ①관료적이며 비민주적인 권위주의를 배제해야한다. ②비합리적이며 적당주의적인 형식주의를 버려야 하며 ③무사적이며 기회주의적이며 이기적인 안일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며 ④합리적인 논리와 과학적 사변을 무조건 반대하는 신비주의를 막는데 서로가 경계함으로써 새 시대, 새 종교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현대가 갈망하는 새 문화 창조에 힘 있게 전진할 수 있는 참여 준비 작업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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