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과 원불교 정신
참석자
김기원
(원광대 교수)
김성관
(원광대 교수)
허광영
(동산선원 교무)
이성은
(사회·논설위원)
때 : 66년 7월 10일
곳 : 본사 회의실
<사진설명: 김기원 교무>
<사진설명: 김성관 교무>
<사진설명: 허광영 교무>
이웃과 함께 사는 정신 기르고
혈인은 제3자가 인증을 해야
공교단다운 세계사적 역할
성은: 오는 7월 26일은 62번째 맞는 법인절입니다. 생각하면 법인절은 대각개교절과 함께 가장 성대히 맞아해야 할 교단의 명절이요 동시에 오늘의 교단의 자신을 법인 정신에 비루어서 엄숙히 되돌아보고 새로운 각오로 미래를 설계할 활력을 일으켜주는 뜻 깊은 날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소태산 대종사에 의한 대각으로 개교된 원불교이지만 법인성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원불교가 공교다이라고 자부할 만한 사실적 근거가 미약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따라서 법인절을 더욱 성스럽게 보다 뜻 깊게 그리고 법인정신을 생활화하자는 뜻에서 오늘의 좌담을 마련했습니다. 먼저 법인의 의미부터 규명해 보기로 하지요.
기원:「법인」이라는 단어 해석부터 해보지요. 법인이란 법계의 인증을 뜻하는데 법계란 진리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법인이란 「진리계로부터의 인증」이라는 뜻이 되는데 저는 이 말을 「법신불로부터의 인증」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법인은 어느 개인이 받은 것이 아니라 원불교라는 교단이 받았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법신불로부터의 인증
성관: 저는 법인의 의미를 2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봅니다. 첫째는 우리가 「법인」이라고 하면 혈인과 연관 지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백지(白指)로 찍은 지장(指掌)이 붉게 나타났다 해서 혈인(血印)이라고 하는 동시에 혈인은 하나의 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혈인 이적을 매우 중요시하는 경향입니다. 그런데 저는 혈인 자체보다는 혈인이 나오게 된 정성, 또는 과정 등 정신적인 문제 즉 기도의 동기를 더욱 중요시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법인 정신을 대체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든가 사무여한 또는 희생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즉 세계에 바친다 진리에 바친다는 측면보다는 「세계일을 내가 맡고 일어섰다.」는 자긍 내지 자부하는 정신으로 의미 지워보고 싶은 것입니다. 참여한 아홉 사람이 세계를 위해 자신을 바쳤다는 것보다는 세계일을 떠맡고 일어섰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능동적이라고 보여집니다.
성은: 두 분께서 법인의 의미에 대해서 새로운 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법인의 증거로 9인 선진의 백지혈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법인의 증거를 제시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서 법인의 증거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이야기해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이 증명해야
광영: 우리 교단이 백지혈인이라는 사실만을 가지고 법인을 증거 삼는다면 혈인의 사실성에 대한 논의도 제기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혈인 당시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보존하고 있었으면 간단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원불교인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믿어줄 수 있겠느냐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혈인을 제3자로 하여금 긍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일은 혈인이 나올 수 있다는 상황을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과연 그 단체에서는 혈인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이적도 나올 수밖에 없다.」하고 인증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라고 여겨지는데요. 그것은 원불교의 나아가는 방향이 제3자로부터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불교는 정말 이 세상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목숨을 걸고 하고 있군, 하늘이 감동할 만한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혈인의 내용과 혈인의 정당성은 20세기의 과학문명에서도 자연스럽게 수용되리라 믿는 것입니다.
기원: 그래요. 혈인은 법인의 「드라마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는 이 「드라마틱」한 증거를 너무 강조하기보다는 의미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다면 대종사님께서 자신의 대각을 바탕으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동기를 품었을 때 이미 법인은 이루어진 것이고 혈인을 통해서 법인은 구체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관: 그런데 우리 법인의 특징은 교조 한 사람에게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아홉 제자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주목할 점일 것입니다.
진리에 근거한 휴머니즘
성은: 교단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야 법인이 증거 된다는 이야기에 많은 수긍이 갑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기원: 교단의 바람직한 방향은 개교의 동기와 혈인 기도의 과정 등에서 그 정신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기도의 동기에서 보면 그 당시의 사회나 문명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의(仁義) 대도가 무너지고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사회, 물질이 사람을 압도하는 문명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를 품고 있지요.
성관: 기도의 동기는 바로 개교의 동기라고도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물질 개벽에 따른 정신의 개벽으로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신의 개벽 작업 이것이 원불교 전무출신이나 교단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라고 하겠습니다. 원불교의 기능이 개교의 동기에 이처럼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만 교단 일부에서는 그 기능에 혼선을 빚고 있는 듯이 보여 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분은 교단의 기능은 사회사업에 있다고도 하고 또는 49재 등 의식행위를 기능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조직체의 활동이 활발하려면 조직체의 선명성이 요구됩니다. 원불교도 개교의 동기를 힘차게 내세울 때 선명성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혈인 기도는 개교의 동기를 구현하기 위한 단합대회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증 받을까.
광영: 기도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사무여한의 정신 즉 창생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이 정신은 오늘날 전무출신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죽었다」는 개념을 잘 정리해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선배처럼 일체의 사사(私邪)를 털어 버리고 원불교에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으며 만일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를 찾아야 될 줄로 압니다.
기원: 기도의 정신을 찾는 데는 오늘의 인간을 잠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오늘날 인간은 모든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함으로써 교만해지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것을 인간 본위의 휴머니즘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대종사님은 대각을 하시고도 다시 진리의 뜻을 물러 인증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음미해야 될 줄 압니다. 법신불에 근거한 또는 진리에 근거한 휴머니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큰일을 하려면 진리와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광영: 그것이 바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 아닐까요.
성은: 결국 한 마디로 법인 정신이란 진리와 함께 사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광영: 법신불과 함께 사는 정신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또는 법신불로부터 인증받는 정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고-. 그런데 인증 받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법신불에게서 인증 받는다고 하지만 그것을 누가 증명해 주느냐. 앞에서도 잠간 이야기했습니다만 주위에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돼요. 원불교라는 교단, 또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전무출신에 대한 사회적인 인증이 먼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제 자신부터 반성할 점이 너무 많아요. 어떻게 보면 전무출신들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기도 합니다. 원불교가 인증받기 위해서는 먼저 전무출신이 한국 사회에서 인증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단의 제도도 교단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공감 되어지는 제도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관: 그것은 교역자의 기능이 문제된다고 봅니다. 사회를 향해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 앞에서 밝힌 것처럼 교단의 기능이 정신개벽에 있다면 교역자는 정신개벽을 위한 실천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역자는 정신개벽에 앞장서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터득해야 되겠지요.
성은: 인증 문제를 이야기 하다 보니까 원리적인 면은 밝혀지는 것 같습니다만 좀 구체적인 데까지는 아쉽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이야기를 바꾸어서 현재 우리에게는 물론 교단을 포함해서 법인정신은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기도정신에의 복귀
기원: 개인은 좀 작은 문제이고 교단은 크니까 큰 교단부터 이야기하지요. 오늘날 우리 교단에 권모술수적인 요소가 있는가 없는가 아마 하나도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법인정신을 살리려면 인의(仁義) 대도를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종사님 정신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법인 정신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광영: 저는 교단 내에서도 인의(仁義) 대도가 완전히 살아나지 못하는 원인을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방편을 사용하는데 목적보다는 방편에 치우친 때문이라고 봅니다. 교단은 어디까지나 사회 속의 교단임에도 사회와 차단된 상태에서 교단만을 위하려는 자세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성관: 원불교의 선명성도 문제가 됩니다.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못하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하고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너무 약하게만 보니까 나타나는 현상 같기도 합니다.
기원: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한 평가 기준도 문제가 되지요. 결과주의에 치우친다거나 물량적인 성과주의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광영: 거기에 많은 원인이 있지요.
성은: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는 기준이 애매한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공(公)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 나는 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니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공(公)이라고 하면서 합리적인 과정과 방법 등을 물시(勿視)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생기고요.
기원: 공의 의미는 성리학에서 찾아집니다. 성리학에서 보면 천리(天理)는 공(公)이고 인욕(人慾)은 사(私)라고 해서 구분하지요. 여기에서 공의 개념은 연유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경우 너무 원리적일 뿐이고 관념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저는 공(公)은 모든 개인들에게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공에는 개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 공만을 강조해서는 곤란하게 됩니다. 공만을 강조하게 되면 자연히 개인이 압박을 받게 되고 그러면 모든 개인의 자유와 평화는 보장되기 어렵지요. 그렇게 되면 공은 소수의 공이 되고 말지요.
집단적 사(私)의 극복을
성관: 윤리학에서도 선악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이 경우 절대적 윤리설은 힘을 잃고 상대적 윤리설이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상대적 윤리설도 극복해야 할 문제는 많이 있습니다만, 상대적 윤리는 상호 조화를 모색한다는 것이 장점으로 보여 집니다. 마찬가지로 공의 문제도 조화적인 면에서, 함께 사는 방향으로 다루어져야 하다고 봅니다. 사무여한 멸사봉공도 어느 한 사람을 위하여 모든 개인은 다 버리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잘 살자는데 의미가 있는 멸사봉공이 잘못 하면 죽음에 대한 찬미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기원: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것도 극단이지만 전체주의로만 나아가는 것도 극단이지요. 그러니까 조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개인과 전체를 살리는 방향으로 공은 이해돼야 할 것입니다.
성은: 공(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이 있을 때 진정한 공심(公心)과 공도행은 살아나리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렇다면 공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선행돼야 하겠지요. 생각해보면 「공(公)이란 2인 이상에 관련된 것」이라는 극히 단세포적인 개념을 아무런 반성 없이 받아들였던 수학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공(公)이 결국은 「편벽된 공(公)」(?)이 되고 말았지요. 국가보다는 교단만을 보는 것도 공이 되고 교단보다는 내가 소속한 기관만을 보는 것도 공이었으니까요.
성관: 그러니까 공이 잘못 이해되면 집단 이기주의나 교단주의 국가 지상주의에 떨어질 염려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 조직을 위해서라면 술수를 부린다 해도 공으로 인정되고. 그러나 그러한 공은 참다운 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교단을 위하는 일은 국가를 위하는 일로 통하고 국가를 위하는 일은 세계를 위하는 일로 통하며 나를 위한 일이 너를 위한 일이 되는 것이 참다운 공의 길이 되는 것이지요.
광영: 바로 그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법인 정신이 살아나지 않는 것 같아요.
성은: 그러면 우리가 무아봉공을 한다. 또는 중생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까.
성관: 「중생만을 위해서 산다.」 이것은 좀 어려운 것 같아요. 나도 중생인데 같이 사는 것이지요.
기원: 중생도 위하고 나도 위하는 것이 되어야겠지요. 만일 중생만을 위한다고 했을 경우 우리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우리보다 못 가진 자, 우리보다 불행한 자를 위해서 나는 나의 식량을 나누어 주었는가. 내 옷을 벗어 주었는가. 결국 교역자가 중생을 위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를 위하고 또 너를 위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성은: 그렇다면 나도 위하고 중생을 위하는 길은 무엇인가를 찾아봅시다.
성관: 결국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인데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아직 찾아지지 않는 것 같아요.
함께 사는 삶의 자세를
광영: 종교가 구원! 구원! 하는데 그것도 이상해요. 구원을 내세우는 종교들이 웬 싸움들이냐 이겁니다. 그것은 자기 것을 너무 강하게 내세우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종교는 종교들이 각기 기본입장을 지키면서 타(他)에는 적어도 피해는 주지 말자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종교들끼리 싸우다보면 고생하는 것은 중생이 아닙니까.
성관: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 또는 창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너무 관념적인 이야기 같아요. 그것은 종교의 또는 교역자의 사명의식을 고양시키자는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 가까운 데서부터 서로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겸허한 자세가 바람직하지 않나 느껴집니다.
성은: 지금가지 법인 정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어떤 공약수 같은 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법인 정신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너무 이념이라는 하늘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현실이라는 땅으로 끌어내리자. 끌어내리는 길은 여하한 경우에도 권모술수적인 행위는 근절하자. 물량주의에 떨어지지 말자. 결과주의에 치우치지 말자.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 발전이 더디다 하더라도 분명한 길을 걷자. 이런 것 아닙니까.
광영: 이러한 내용이 지상에 발표되면 철모르는 이야기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늦더라도 대종사님 정신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관: 지금 「늦는다.」는 표현을 했는데 사실은 그 길이 빠른 길이지요. 빠르다고 뛰어가다 보면 거꾸로 가는 수도 있으니까요.
광영: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제 자신을 돌아다보면 교역자라는 신분을 떠나서 한 사람의 자연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얼마나 인증 받고 사는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정말 일체를 바친다는 길이 어떠한 길인가 찾아보고 싶을 뿐입니다.
기원: 그건 모두 같은 마음일 겁니다. 제 자신도 과연 세계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반성하곤 합니다. 아울러 교단이라는 단체도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 기여할 수 있는 단체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교단과 우리는 사실 공동운명체입니다. 영광도 같이 합니다. 교단이 초라하면 나도 초라해집니다. 교단을 영광스럽게, 그래서 나도 영광스럽게 되고픈 소망을 법인절에 다져봅니다.
성관: 사실 뭐니뭐니해도 인간으로서 떳떳이 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교의 동기를 법인정신으로 무장하며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고 사는 소박한 자세부터 가꾸어 가고 싶습니다. 희생이란 말은 아직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조화하는 삶과 함께 사는 삶을 가지렵니다.
성은: 80여 분 동안 정말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 가운데 혹 기도의 정신이나 오늘의 교단에 대해 심층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 점은 아직 우리가 무언가 찾는 과정, 탐구하는 입장이기에 있을 수 있는 일로 선배님들의 채찍으로 보다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62주년의 법인절을 더욱 뜻 있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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