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에 달하면 회생하는 진리 깨달아
옥토에 씨 부리지 못하는 안타까움

 『만나 뵙기 어려운 대종사님을 20여 년 동안 모시고 살았으니까 지견이 열렸다면 성불했을 텐데ㆍㆍㆍ』
 영광지방을 제외하고 여자로서 입교번호가 2번이었던 동타원 권동화법사님.
 장수군 산서면에서 출생, 16세에 진안군 마령면 전음광 선생과 결혼하였고, 시어머니인 전삼삼의 연원으로 원기 8년 입교를 하게 되었다.
 교단 사상 처음 있었던 대종사의 은자 1호가 된 남편의 출가함에 따라 전주로 이사를 하고 법사님은 대종사님을 뵙게 되었다.
 『그 당시 상투를 쫒고 계시는 대종사님을 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지. 그런데 무엇하러 왔느냐고 물으시기에 사람 노릇 하는 법을 배우러 왔다고 대답했어.』
  1925년(원기 10)총부로 이사, 심신작용 처리 건이며, 생활의 모든 것을 일일이 대종사님께 말씀드리고 지도를 받으며 생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하는 삶을 가꾸었던 초기 교단의 혈심제자였다. 때로 남편에게 말할 수 없는 일도 낱낱이 말씀드리며 우주를 감싸고도 남을 법열로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성리법문 듣기를 좋아해서 문답을 잘 했는데 어느 날은 조실로 오라고하시더니「오늘 동화가 대답한 그 길로 꼭 나가도록 해」하고 말씀해 주셨지.』
 그러나 청천병력 같은 대종사의 열반이 후 소용돌이치는 고난이 세월이 파란만장하게 전개되었다. 일제치하에서 능란한 외교활동으로 교단을 수호했고, 대종사의 신변 보호를 위해 방패 역할을 다했던 남편 혜산 전음광 선생이 허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자 물의가 일어난 것.
 『교단 위해 헌신한 공은 간곳없고 과실만이 남아 비난의 화살이 날아 들때, 기가 막혔어. 그래도 나는 대종사님으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았던 실력, 이때 발휘하자 만일 이 경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지게 되고 영생갈이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며 진정을 하고 다만 육조대사가 되지 못한 것만을 한탄할 뿐이었어. 행여나 자식들 신심이 물러날까봐 전전긍긍했고』
 그러한 경계에서 더욱 신앙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신앙심이 만사를 이루는 근본이 됨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리라. 대종사님으로부터 많은 귀여움을 받는다고 시기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입었기에 고난을 이길 힘도 또한 생기지 않았을까?
 『그 역경을 이겼기에 온 가족이 이 회상을 떠나지 않고 제도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평생 보람으로 여기지. 모든 잘  잘못에 대해 사람이 평가하는 것에 흔ㄷ글릴 것 없고, 진리의 인가를 받아야만 된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어, 극도에 달하면 다시 열리는 이치가 있으니 그 고비를 잘 넘겨야 된다고 생각해. 진리의 시험에 떨어져서는 안 되지』
 인과보응과 불생불멸한 진리를 믿고 수행하는 적공이 잇기에 떳떳했던 생애였다.
 『나라는 상으로부터 나오는 명예욕만 때면 걱정이 없어. 형제같이 지냈던 교단의 원로님들 자꾸 반말이 나오는 것도 이 명예욕 안 떨어져서 나오는 것 같아』
 좋은 옥토(복전)만났지만 씨앗 없어 못 심고 가는 것만이 안타까울 뿐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단다.
 『팔근이 전무출신 안했다면 난 살기 힘들었을 거야. 팔진이도 결혼해서 미워했는데 미국에서 교화 활동하니 이제 반분이나 풀렸지.』
 정토회 원로로서 젊은 회원들에게 긍지와 사명감을 심어주고 극한 상황에서 회생하는 진리를 교훈으로 일깨워주는, 법사님은 지난날의 역경이 물거품 같다고 하면서 미운 마음 하나도 없다고 담담한 미소를 짓는다.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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