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종교로 도약을 기도한 반백년성업
9인 정신 이어받아 이룬 재방사업

사진>원기 56년 10월 7일 영모전 낙성 봉고제
새 회상을 열 준비
 1919년(원기 4년) 10월 22일 대종사는 부안군 산내면 봉래산 월명암을 찾았다.
 대종사가 1916년(원기 3년) 영산 해변을 막는 방언공사를 했고 이듬해에 3월부터 9인 제자들에게 기도를 실시 마침내 백지혈인이 성사를 나타냈다.
 이와 같이 새 회상 창립의 정신적 기초를 다진 대종사는 복잡한 정신을 휴양하고, 재래 불교의 교리와 재도를 실지 참고하여 장차 혁신할 본교의 교리와 제도를 초안하고, 사방 인연을 서로 연락하여 새 회상을 열 준비를 하며 분망한 세상에 중인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월명암 행가를 단행 했던 것이다.

초기 교단의 여걸
 교단 초창 당시 여걸의 한분으로 불리웠던 일타원 박사시하 선생, 일찍 부군을 사별하고 구례 화엄사 화주로 독실한 신자였는데 1924년(원기 9) 최도화 선생 연원으로 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었다. 입교한 후로 어려운 교단사의 뒤안길에서 동분서주하여 헌신, 총부에 계실 때는 대중들의 신발을 씻어준다. 이불을 튼튼히 누벼준다. 옷을 빨아주는 등 친 자녀처럼 알뜰히 보살펴 주었다.
 대종사께서 설법하실 때는 문정규 김남천 선생 등과 백발을 휘날리며 춤을 추었고, 전삼삼 노덕송옥 최도화 선생 등은 무수히 예배를 올려 법흥을 돋우고 대중의 기운을 한데 뭉쳐 법열에 넘치게 했던 것이다. 밖으로는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육타원 구타원, 융타원 법사 등 1대내 5백75명의 연원을 달았다.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때로는 방물장수 취급을 당하고, 어서 가라고 여비까지 주는 창피며, 또 때로는 없다고 피하기까지 하는 멸시를 받으면서 기어이 입교를 시켰던 정성과 끈기.
 1946년(원기 31) 10월 18일 손에는 염주를 굴리며,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언변이 좋거나, 학식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꾸준한 실천력으로 사회의 이해도 없었던 그 당시 서울 광주 남원 임실 등을 돌아다니며 교단을 내집삼아 교화활동을 했던 것이다.

두 분 성자를 교단에
 정산 주산 두 분 종사를 이 회상에 바친 대희사위 구산 송벽조 선생은 1951년(원기 36) 10월 11일 75세로 최후를 마쳤다.
 경상도 성주 송 씨 가문의 독자로 유학의 길을 걸어온  전형적인 유가의 선비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남다른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 헤매이는 장남 「정산종사」를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뒷바라지를 해오다가 드디어 올바른 스승(대종사)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완고한 문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가족을 영광으로 이사시켰다.
 1926년(원기 11)에 출가를 하여 영산교당 교무 등 선원생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한때 좌선에만 전력 수승 화강을 조급히 바라다가 두통을 얻기도 했다. 평소 남 주기를 좋아하고 정직하기만한 덕인이었지만 불의에는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1940년(원기 25)경에 일본 천황에게 「지금 한국민족이 도탄에 빠졌으니 정신을 차려 새로운 정책을 세우라」는 진정서를 발송하였으나 일경에게 압수되어 마침내 1년 반의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평생 대종사님을 부처님으로 모시는 동시에 아드님이지만 정산종사도 대종사님의 분신으로 알아 추호도 소홀함이 없게 하였던 것이다.

만대의 터전을
 영산 정관평 방언공사가 끝 난지 40여년 후 1956년(원기 40) 10월 26일 「9인 정신 이어 받아 재방사업 이뤄내자」는 표어를 높이 들고 제2차 방언공사를 시작했다.
 대종사는 교단 만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9인 제자를 얻고 저축조합을 창설하고 근검저축 금주단연을 하게하여 조합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숯장사로 만든 9~9천원의 자금으로 간석지를 막아 1918년(원기 3)제 1차 방언공사를 착수 했던 것이다.
 40여 정보의 재방언 공사는 규모는 비록 크지 않으나 1차 공사 때와는 달리 수많은 교도들의 열렬한 호응이며 국가에서까지 협조를 받았던 것이다.

사랑과 훈증으로
 10월 6일은 응산 이완철 대봉도의 12주기다. 친형 도산 이동안 종사의 연원으로 대종사를 뵙고 1930년(원기 15) 전무출신을 서원, 총부 농업부원으로부터 36년 동안의 출가 생활을 교단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1943년(원기 28) 47세에 수위단원에 피선 되었고 「응산」이란 법호를 대종사님으로부터 받았다. 6.25동란 시에는 산업대장이라는 이름으로 총부를 사수 아였다.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훈증으로 자애심 많은 어머니처럼 교단의 근심 걱정을 두루 살폈고, 특히 농어촌에서 고생하는 교무들에게는 당국에 알리어 약을 지어 보내는 등 세세곡절 챙겨주던 알뜰한 스승님이었다.
 교단의 입법, 행정 감찰, 교화, 편찬 등 각 방면에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던 개척의 성자, 교단을 떠나서는 기쁨도 슬픔도 몰랐고 공을 떠나서는 사를 생각할 줄 몰랐던 순일무사한 공심의 표본이었다. 항상 약자를 더 보살펴 주었고 두호했으며 「후진 커나는 재미로 산다」고 흐뭇해 하던 교단의 대들보.
 대종사께서도 대중의 잘못이 있을 때는 의례히 응산님을 불러 꾸중하였지만, 조금도 불만이나 섭섭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장한 일 했을 때는 당신이 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래서 언변은 없었으나 내면적 인격에서 풍기는 감화력은 대단했다.

반세기 업적 결산
 1953년(원기 38)4월 26일 제일대 성업봉찬식이 거행된 이후 1971년(원기 56) 10월 8일 반백년 기념대회가 개회되었다.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라는 주제를 내세우고 ①교단 반세기의 찬란한 업적을 결산하고 소태산 대종사를 비롯 역대 선진에 대한 보본의 기념사업을 하며 ②세계 종교에로 도약을 기도하며 개교이념을 널리 펴서 인류를 구원 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기념사업으로 ①기념관을 비롯 영모전 종법원 정산종사 성탑과 기타 부속 건물 등 건축사업 ②교화사업으로 1963년(원기 48)부터 8년 동안 교화삼대목표, 추진운동을 전개하여 92개의 교당과 1천4백57교화 단을 불리고 7만9천6백5명의 교도를 증가시켰다.
 ③「개교반백년기념문총」을 비롯 「원불교전」으 영역 본을 출판한 편집사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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