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부 건설과 초창기 교단 창립에 공헌
원기 8년 6월 부안 봉래정사에게
대종사님게 귀의한 후 오직 한길로
영생의 보내 구슬

 팔십이년풍우과 (八十二年風雨過)
 공산귀로개휴휴(空山歸路皆休休)
 중양망월고고창(重陽望月孤高彰)
 황국청향의절휘(黃菊淸香義節輝)
 초발심정숙겁인(初發心正宿劫因)
 일념정식영생주(一念靜息永生珠)
 칠타원 세월영가(七陀圓世月靈駕)
 래거거래무애가(來去去來無碍)
 인간세상 82년
 희로애락 끝났으니
 자성동산 찾아갈제
 만사가 시었도다
 구월보름 달 밝은데
 홀로 높이 솟아났고
 가을국화 맑은 향기
 의절이 빛나누나
 초발심이 바른 것은
 숙겁의 선인이라
 한 생각 고요하니
 영생의 보배 구슬
 칠타원 정세월 정사영가시어
 세세 생생 거래간에
 걸림이 없으소서.
 
 익산총부 건설과, 초창기 교단 창립에 16세에 수산 서중안 선생과 결혼하였고, 원기 8년 6월에 부군과 함께 봉래정사에서 대종사를 처음 뵙게 되었다.
 이때 대종사께서는 『내가 오늘 어디를 좀 다녀오려고 행장을 차리던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내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렇게 조그마한 사람이 오는군. 하지만 영은 매우 크구나. 내가 장차 큰 회상을 열어 고해 창생을 다 제도하려 하니 그 대도 새 회상의 큰 주인이 되기 바라노라. 그대에게 세월이란 법명을 주노니 인간 세상을 밝혀 비춰주는 달 같은 인물이 도라』
 이로부터 잠시도 대종사의 법문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선생의 가정은 부군이 김제 읍에서 수십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큰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어서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그래서 선생과 부군은 대종사에게 간곡히 청하였다.
『이곳 봉래 정사는 교통이 불편하고 장소도 좁아 대중이 모이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교통도 편리하고 장소도 넓은 곳을 택하여 새 회상을 열어 일체 생령을 구제함이 마땅할 줄로 압니다. 저희들이 비록 별다른 힘은 없으나 약간의 재산이 있으니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종사는 이에 용기를 얻어 봉래정사를 떠나 장차 회상을 펼 결단을 내리게되었고, 마침내 원기 9년 익산총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런데 익산총부는 서중안 선생이 총부 건설의 기지로 3천평의 땅을 사사 기증했고, 아울러 건축비 6백원가지 희사한 것이 가장 큰 토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서중안 선생은 불법연구회 초대회장이 되어 크게 활약했다. 이 모두가 칠타원 정사의 내조에 힘입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칠타원 정사는 원기 17년부터 전무출신으로 출가하여 총부 공급주무ㆍ내감원ㆍ순교ㆍ중앙수양원 주무ㆍ감원 등 21년 간 봉직했다. 감원으로서 총부 살림을 맡을 때에는 활달한 성격과 치밀한 보살핌으로 대종사의 수족 같은 역할을 했고, 후진들에겐 어머니 같은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심지어 후진들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해 주기까지도 했다.
 또한 원기 20년 동선 대에는 대종사로부터 초 견성 인가를 받기도 했고, 원기 30년에 칠타원이란 법호를 받고 여자수위단을 처음 조직할 때 곤방 단원이 되었다.
 제 1대 성업봉찬 사업을 끝내고 원기 39년 6월부터 중앙수양원에 입원하여 수양에 힘쓰다가 이번에 열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열반을 얼마 앞두고 『음력 구월 보름에 가겠다』고 미리 날을 받아 두기까지 했다. 과연 음력 구우러 열 사흘에 열반하고, 구월 보름에 알봉묘지로 가게 되었는데, 마침 추계교역자 훈련에 참가 중이던 수백 명의 후진 교역자들이 칠타원 정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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