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해외 교화 어디까지 왔나?

<사진설명: 손정윤 □ 본사주필 전팔근 □ 원광대 사대학장 □ 해외포교 연구소장>
○… 대산 종법사는 연초에 교단 2회 말까지 해외교당 1백 개 설립을 교단정책으로 천명했으며, 지난 11월에는 세계 종교 연합 기구 창설을 제안했다. 그럼 교단의 해외교화는 지금 어디까지 왔나? 전팔근 해외포교연구소장과의 대담을 통해 조망해 본다. …○
외국인 상대의 교화는 이제 겨우 시작할 단계
문서교화의 선봉 「원부디즘」은 통권 32호 발간
첫 해외 포교사는 박대완, 처음 교당은 일본 대판
첫 외국인 교도는 미국의 원일관(랄프·L·고긴)
해외교역자 지망생 많이 나오고 정책적 양성 뒤따라야
진정한 종교 연합은 동서 진영의 화해보다 더 어려원
영문판 일어판 교전은 발행, 교서 번역은 앞으로의 과제
<사진설명: 로스엔질리스 한인회관 기공식에 원불교 대표로 참석한 전학장(中)>
<사진설명: 첫 해외 교무 박대완, 첫 외국 교도 원일광>
개척자들의 발자취
손= 전 학장은 현재 우리 교단에서 해외교화에 앞장서고 있는데, 이 분야에 일을 해 온지 얼마나 되었나요?
전= 원기 45년(1960)에 해외포교연구회가 발족되었고 이듬해에 원광대학에 해외포교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이 해 겨울부터 영문판 「원부디즘」을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2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손= 그렇다면 원기 40년대부터 해외포교란 용어가 사용되었군요. 또 개교 반백년 대 이후 세계 종교로 발돋움 하자는 소망이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금년부터는 대산 종법사께서 창립 제2대말(원기 72년)까지 해외에 1백 개 교당을 설립하자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전학장의 사명이 더욱 무거워지겠습니다.
전= 물론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해외교화에 관심을 갖고 헌신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나 역시 지금가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해외 교화의 밑거름이 되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손= 우리 교단에 있어서 해외 교화의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한 번 더듬어 볼까요.
전= 첫 해외 포교사는 박대완 선생이지요. 선생은 원기 20년(1935) 6월에 첫 해외 포교사로서 일본 대판 교무로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어쩔 수 없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서 고생하는 교포들을 중심으로 대판 교당은 상당히 교세가 활발했던 모양입니다. 교당이 바로 두 개로 늘어났으니까요. 대판 교당 설립에는 조송광 선생의 공이 큰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손= 이 무렵 만주 목단강을 중심으로 해서도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상대로 교화활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교직 없는 순교무 장적조 선생이 활약했습니다. 선생은 총부로부터 정식 발령을 받은 것은 아니고, 두만강을 건너가는 동포들을 따라가서 몇 년간 그들과 함께 생활한 것 같습니다. 언제 갔고 언제 돌아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원기 26년(1941) 1월에 찍은 「목단강시 불법연구회 기념」이란 사진 한 장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만주 교화의 유일한 자료입니다.
전= 정자선 교무가 시카고 주재 순교감으로 원기 58년(1973) 1월에 미국으로 가 교화활동을 하다가 병을 얻어 이듬해 가을에 귀국 몇 달 후 열반했습니다. 이는 어느 의미에서 순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성 교무가 원기 57년 7월에 로스엔질리스 교무로 갔다가 1년여 만에 귀국 이번에 다시 캐나다 토론토로 갔습니다. 또 박장식 교령, 송영봉 교감, 백상원 박성기 교무가 미국에서 교화활동을 펴고 있고 유수일 교무가 1년 가까이 있다가 왔습니다.
손= 원기 52년(1967)에 전학장과 정유성 교무가 순교무 직책을 갖고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전학장은 2년 후 귀국했고, 정유성 교무는 아직 있지요. 이듬해에는 김대현 교무가 대만에 유학을 가서 6년 만에 귀국했고, 지난해 2월에는 양현수 교무가 일본에 유학을 갔습니다. 이러한 유학생들의 활동 역시 해외교화의 밑거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미국이나 캐나다 일본에 거주하는 재가교도들의 노력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누구누구라 이름을 지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일본 대판에서부터 미국 캐다나 각 지의 교포들이 지성으로 교당 설립을 염원하고, 협조하는 것이 출가교도 못지않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교단의 정책이 이들의 노력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는 점도 있을 정도로 적극적입니다.
시찰·친선교화
손= 약간 다른 각도에서 해외교화의 선구적 역할을 살펴봅시다. 즉 시찰 친선 교화의 입자에서죠. 원기 42(1956)년 1월에 박광전 원광대 총장이 교단 소개와 교육계 시찰을 목적으로 구미 여행을 다녀왔지요. 이때 영문판 요람을 갖고 갔습니다.
전= 그렇습니다. 이때부터 해외 각국과 친선 교류가 시작되었고 교단 대표가 각국을 시찰하거나 각종 종교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원기 43(1958)년 11월 태국 수도 방콕에서 열린 제5차 세계 불교도 대회에 최초로 교단 대표를 파견하게 되었는데, 이 때 박광전 총장이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이어서 원기 48(1963)년 11월에는 박광전 송영봉 두 분과 본인이 일본 불교계를 시찰했고, 원기 51년 3월에도 시세인 정읍교구장이 2개월간 일본 각지를 순방, 11월에는 황정신행 법사가 태국에서 열린 제8차 세계 불교도 우의회에 참석, 12월부터 2개월간에 걸쳐 이공주 법사가 동남아 불교계 시찰 원기 53년 9월에는 이운권 법사가 대만 불교계 시찰, 원기 54년 4월에는 김정용 원광대 교무처장이 말레이시아 쿠아라룸푸르에서 열린 제9차 세계 불교도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손= 원기 55(1970)년 10월 일본 경도에서 열린 세계 종교가 평화회의에 교단대표로 박장식 김정용 이공전 전팔근 네 분이 참석했군요. 다시 이듬해 5월 일본 오꼬하마에서 열린 세계 연방평화촉진 종교자 대회에 박광전 김정용 김윤중 모상준 네 분이 참석했습니다. 이때는 7천여 명이 모인 큰 대회였습니다. 또 이 해 7월에는 한일 불교 친선 세미나에 박장식 정성숙 문동현 이대하 네 분이, 원기 58년 11월에는 한일 종교인 회의에 박장식 박제권 송원철 문동현의 네 분이 참석했습니다. 이외에도 수차에 걸친 국제회의 참가가 있었고, 또 원광대학, 원광여중고등학교에서 수차에 걸쳐 세계 각국의 교육계 시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국제수련대회와 원부디즘의 발간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 원부디즘은 원기 46(1961)년 겨울초로부터 시작해서 1년에 2차례씩 현재 통권 32호가 나왔습니다. 1호에 5백부씩 인쇄해서 세계 각국의 2백여 기관과 1백 50여 개인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편집방향을 보면 초기에는 제도나 교사를 중심한 원불교 소개를 했고, 현재에는 교리면의 소개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원부디즘으로 인해 상당수의 외국인 교도가 생겼고, 외국인들의 원불교 이해에 큰 도움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서신 교화의 면에서 볼 때 원광대학 도서관에서도 11개국의 32개 기관과 다수의 개인들을 상대로 간행물을 교환하고 있으며 그 외 몇몇 교수들이 개적 펜팔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도 또한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원불교 교도 국제 수련대회는 원기 59년(1974) 4월에 로스엔질리스에서 「세계 평화와 종교의 사명」이란 주제로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는 미국 교포를 중심으로 국내의 교도들도 다수 참석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다시 제2회 수련대회를 가졌습니다. 제3회 대회는 유럽에서 가질 예정인데, 앞으로는 3년 만에 한 번씩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준비단계
손= 가끔 해외 교화가 본궤도에 오른 것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현재 어느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전= 그야 보는 각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직도 준비 단계라 보겠습니다. 즉 해외교화는 현재 교포들이 중심이 되고 있지 외국인들을 별로 상대하고 있지 못합니다. 또한 해외교화를 위해서는 준비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손= 편의상 해외교화를 시기적으로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단계는 일본과 만주를 중심한 해방 전입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지 못했고, 일본의 경우만 해도 해방 이후 대판에는 시도했으나 아직 교역자를 파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당까지 마련되고 교역자만 파견하면 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 단계는 교단 대표의 시찰 친선 교화입니다. 셋째 단계가 해외 교당 설립과 교역자 파견입니다.
전= 엄격히 말해서 해외 교화란 외국인을 교화의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도 아직은 주로 교포를 상대하고 있고 로스엔질리스 뉴욕 시카고 토론토 휴스톤 등에 교당이 설립되었고 휴스톤을 제외하고는 교역자가 주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교당 역시 교역자가 직접 생활비의 일부까지 마련해야 할 실정입니다. 또 대판, 샌프란시스코, 미시간 등에도 교당이 곧 설립될 전망입니다.
외국인을 위한 교서 번역도 초보 단계에 있습니다. 원기 41년에 중국어 독일어 일본어판 요람이 간행되었습니다. 영문판 교전은 원기 56년 7월에 일어판 교전은 원기 60년 7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해외 교포 교화는 어제 시작했고, 외국인 상대의 교화는 준비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손= 현재 외국인 교도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전= 최초의 외국인 교도는 원기 48년(1963)에 입교한 미국인 원일광(랄프· Lㆍ 고긴)입니다. 그는 당시 미공군 사관학교 교수였습니다. 이어서 원법광(스테븐· B? 레노빗치) 독일인 원정각(린다· 스페세) 중국인 전만시 등 입교한 교도수가 약 50여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만 하루 빨리 조직적인 관리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이들이 처음 가졌던 교단에 대한 정열을 계속 불태울 수 있고, 나아가 외국인 교화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원기 54년(1969) 10월에는 교포 고소현씨가 미국인 부군 원광명(로이드· R· 스트롬 씨) 및 어린 딸인 원진광 등 세 가족이 교도가 되어 미국의 첫 일원가족으로 축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원가족이 계속해서 많이 나와야 하고, 외국인을 상대로 한 교화가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하겠습니다.
산 넘어 또 산
손= 우리 교단의 발전사가 평지에 태산을 쌓는 고난과 보람이 역사였습니다만 해외 교화는 더욱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산을 넘고 또 산을 넘어 계속적인 노력만이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 해외교화를 위해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점은 어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전= 먼저 해외 교역자 파견을 들 수 있겠지요. 국내 교역자도 부족한 형편이지만 해외 교역자 양성의 시급성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천부적 소질과 불굴의 사명감을 가지고, 외국어에 능통한 교역자를 길러 파견해야 합니다. 네 가지 형태의 해외교역자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국내에서 양성한 해외 교역자, 신심이 깊은 교포자녀를 국내로 불러들여 양성한 교역자, 외국인 교도를 국내로 초청해서 양성한 교역자, 총부를 다녀간 외국인들을 활용하는 경우들입니다.
원기 43년(1958) 10월에 처음 총부를 내방한 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 리차드· 가드 박사는 원불교의 해외 소개에 상당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총부를 세 차례나 방문했지요. 그 후로 서독인 호만씨, 린다 스페세, 미국의 평화봉사단원으로 원광대에 근무했던 스템토씨, 역시 원광대학에 유학 온 미국인 키트너, 중국 문화학원의 전만시 교수 등 이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손= 요즈음 예비교역자들이 외국어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해외 교역자를 지망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많은 사람이 해외 교화에 관심과 정열을 가져야겠지요. 이런 점에서 박창기 선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은 비록 직접 해외 교역자가 되지도 못했으나, 해방 이후 해외 교화의 필요성과 해외 포교사 양성을 맨 처음 주장했고, 또한 많은 노력까지 했습니다.
전= 해외 교역자 다음의 문제는 외국인 교화입니다. 그들은 청소년층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 사회에서는 동양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차츰 높아가고 있고, 특히 선(禪)에 대한 관심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통해 이들을 지도한다면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일본의 천리교는 아프리카 지역에 우리나라의 통일교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 많은 진출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적극적 교화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교역자들은 동양적인 소극성을 탈피하고 점잖병 귀족병 대우병 등을 극복해서 교화에 미쳐 버릴 정도의 적극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손= 교서 번역도 중요할 것 같군요.
전= 물론입니다. 이제 겨우 요람과 영문판 일본어판 교전만 나왔습니다. 모든 교서가 번역되어야 할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번역에 있어서 한국인이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한계점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1차적으로는 한국인이 번역을 시도해야겠지만, 2차적으로 교포나 나아가 외국인 교도에 의한 번역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손= 그 지역사회에 적응하고 문제도 미리 연구되어야 할 것 같군요. 즉 외국 사회에 대한 토착화의 문제입니다. 같은 한국 내에서도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교화방법의 다양성과 신축성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민족과 문화적 특성이 다른 외국의 경우에는 미리부터 적응의 방법이 충분히 연구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 마지막으로 해외교화 자금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현재 각종 사업회가 있어서 분야 분야의 뒷받침을 해주고 있는데 해외 교화 사업회만은 아직 없습니다. 해외 포교 연구소 역시 원광대학과 지방 몇몇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움직이는데 1년에 겨우 수십만 원의 규모이기 때문에 적극적 활동을 못하고 있습니다.
희망적인 미래
손= 이상과 같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해외교화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전= 한 말로 희망적이라고 믿습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미래관이 매우 긍정적입니다. 대종경 전망품이 그렇고, 『장차는 서양 사람들이 와서 일원대도를 배워 갈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당시에는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눈앞에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또 내가 10년 전 미국에 유학 갈 때에는 미국 사회에 원불교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미 여러 개의 교당이 세워졌습니다. 대산 종법사께서 앞으로 10년 이내에 외국에 1백 개 교당을 말씀하셨는데 「성인들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말을 굳게 믿습니다.
손= 대산 종법사께서 이번에 세계종교 기구의 창설을 제의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전= 먼저 가까이 한·일 간의 종교연합, 나아가 아세아 종교연합, 다시 세계종교 연합의 방향으로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산 종법사께서는 현재의 UN이 세계의 평화 달성에 제대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 UN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종교란 신념이 문제이기 때문에 실질적 단합이 더욱 어려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같은 종교끼리 수많은 파벌이 있고, 심지어 같은 종단에서도 서로 대립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세계 각국이 다 갖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 세계의 종교대표자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해서 세계 평화에 얼마만한 기여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종교인들 스스로의 냉철한 반성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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