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시련이 몰아 닥쳤을 때
스승과 동지 새롭게 느껴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자란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향 산을 그리워한다. 새 움이 돋는 논 색의 봄 산, 검푸른 여름 산, 단풍진 가을 산, 하얀 눈 덮힌 겨울 산, 어느 산 하나  어린 시절의 그리움이 배어있지 않은 산이랴.
특히 서늘바람이 일면 조상들이 묻히어 계신 성묘 길 가을 산이 더욱 그리웁다.
도회지의 한 복판, 그것도 한약방에서 근무하는 나는 사철이 변하는 것을 약방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의복에서 뿐 느낄 수가 없다.
하루가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약방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것은 항상 길 건너편을 가로막고 선 회색빛 시멘트 건물과 행길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과 자동차, 이제 면역이 되어버린 한약 냄새.
나는 전무출신을 지원하고 고향을 떠나 이리 보화당 본점에서 5년, 서울 보화당에서 5년, 대전 보화당에서 6년을 근무했으니 약방 유리창 속에 갇혀(?) 16년을 살았다.
대전 보화당에서는 「책임자」라는 무거운 짐까지 짊어지고 살면서는 오늘의 나를 키워주신 스승님들이나 보살펴주시는 선진님들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낀다.
「공부하는 사람은 세상의 천만 경계에 항상 삼학의 대중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니, 삼학을 비유하여 말하자면 배를 운전하는데 지남침 같고 기관수 같은지라, 지남침과 기관수가 없으면 그 배가 능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요, 삼학의 대중이 없으면 사람이 능히 세상을 잘 살아 나가기가 어렵나니라.」(대종경 교의품 22장) 하셨다.
나는 가끔 한가한 시간이면 머릿속에 있는 내 인생의 필름을 되돌려보곤 한다. 그 필름 속에는 내 인생에 커다란 매듭 하나를 만들어 준 원기 63년 3월 30일이 선명하게 찍히어 있다.
기도하고 내 인생을 새롭게 생각하고 비춰볼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전 원광 한의원의 화제 누가 손톱만큼이나 예측했던 일인가.
대전 원광 한약방이 설립되어 초기의 갖가지 어려움을 딛고 이제 겨우 안정된 궤도에 오르려 할 때 하늘이 무너지는 변이었든가.
내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악몽이 시련이라기에는 너무 엄청난 시련이었으며 원광 한약방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너무나 벅찬 시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큰 시련을 어떻게 지내고 살았던가 싶다. 모두 법신불의 가호였으며 스승님들의 격려와 동지들의 위로가 그 고비를 넘겨주었다.
전무출신을 하면서 그처럼 스승들의 보살펴주심과 동지들의 따뜻한 정을 생각하여 본 일이 없었다. 새삼 스승님들을 잊고, 옆 동지들에게 무관심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생활이 송구스럽고 부끄러웠다.
원광 한약방이 복구를 시작하였을 때 출가· 재가 교도들의 보내준 성원은 정말 눈물겨운 고마움이었으며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임직원들이 교단을 새롭게 생각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큰 시련을 당하여 그 고비를 무사히 넘기면 자신도 그만큼 성장함을 알았다.
이 때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스승님들이나 동지들의 모습, 어려움을 이기게 했던 교단의 모습은 나에게 큰 깨달음이 되어 나의 신심과 공심의 생활에 촉진제가 되고 각성을 하는 힘이 되고 있다.

<대전 원광 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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