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완(完)>

선·후진의 도
김현 교무
<영모원 총무>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한 전인적 인격 요함
모든 수용은 합리적 제도 정착 중요
공화(共和) 통한 지혜총화는 합리화 보장
교단품 2장에 보면 대종사님께 창립 12년 총회에 여러 제자들의 감상담을 들으신 후 「오늘 이 기념을 맞이하여 선진과 후진 사이에 새로운 감사를 느끼고 새로운 깨침을 가지라.」하시며 후진은 선진들이 쌓아온 창립의 공로를 생각하고 선진은 교단을 계승 발전시켜 줄 후진들을 생각하여 선진과 후진 사이에 서로 감사하고 공경하며 반가운 생각을 가져서 업어서라도 받들고 영접하여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말씀과 함께 「선진 후진이 다 이와 같은 생각을 영원히 가진다면 우리의 교운도 한 없이 융창하려니와 그대들의 공적도 또한 한 없이 유전될 것을 의심하지 아니하노라.」하셨다.
3회 36년을 지나고 2대 2회 말을 거쳐 이제 2대 말을 앞에 두고, 교단의 재정비를 요청받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대종사님의 1회 말 총회의 법문을 새겨 볼 때 우리는 과연 무궁한 발전을 의심치 않을 만치 업어서라도 받들고 영접해 주는 충만된 기쁨과 감사와 사랑의 관계로 만나지고 있는가?
「이 뒤에 후진 노릇 잘 하는 전무출신이 오거든 내가 온 줄 알아라.」하셨다는 공타원님의 유훈을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선진님들께 많은 아쉬움과 섭섭함과 걱정을 드리는 후진임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공타원님의 유훈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교단 현실에서 느껴지는 선후진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도량이 깊어가고 있다.
그 징표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지난 기관교무 훈련과 교단 간부훈련 사이에서 오갔던 지도력의 문제에 대한 기대와 응답(반응)사이에서 느끼는 거리감은 이를 실증하는 한 표현이었다고 생각된다.
무엇이 이 도랑을 깊게 하는가.
그러면 무엇이 이 보이지 않는 도랑을 만들고 선진에 대한 존경과 후진에 대한 기대를 약하게 하는가?
여기에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은 한국적 상황의 일반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가치관의 차이다.
군주, 정치, 유교문화, 농경사회에서 이어져 온 전통적 가치관과 민주주의 산업화 서구문화에 휩싸인 새로운 가치관 속에서 순종과 자율, 희생과 보장, 신앙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 전체와 개성, 교단과 사회, 전통과 창조 등등의 문제가 상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대립과 모순으로 갈등을 일으켜 선진들의 그 간절한 신심과 공심에 대한 호소가 후진들의 보장, 개성, 자율이론 속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역사의 흐름과 함께 교단이 대형화되며, 함께 일하고, 함께 수행하고, 함께 이루는 일이 적어지고 분화가 촉진되어 관계가 약화되고 공동목표보다 개인목표에 치중하며 인정적 소통의 기회와 공감의 장을 잃어가고 있다. 어른들의 호통이나 젊은이의 진언이 메아리를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가 하면 교역자의 수적 확대가 명함을 필요로 할만치 서로의 관계를 소원하게 한다.
인격에 대한 상호 기대감의 차이도 도량을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된다.
원불교적 인격은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한 전인적(全人的) 인격을 목표한다. 그러나 이 종교적 인격과 사회적 능력을 겸비한 인격을 이루기는 쉽지가 않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훌륭한 수행자이고 유능한 실력자이기를 요구한다. 일을 잘 해도 수행이 부족하다고 불신하고 수행을 한다 해도 현실을 모른다 하여 편벽된다고 한다.
여기에 존경받는 선진, 신뢰받는 후진이 되는데 어려움이 있다.
관계의 회복
우리는 이 바리지 않는 도랑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한다. 2대 말을 향하여 교단의 무궁한 발전을 향하여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한없는 교훈의 융창을 위하여 선· 후진은 하나에서 만나야 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본의를 생각하는 일이다. 대종사님의 본의, 스승님의 본의, 출가의 본의, 개교의 본의에 대한 반성 속에서 현재를 직시하고 대종사님이 뜻 하시는 광대 무량한 낙원을 바라보며 그 희망을 흐리게 하는 너울들을 하나하나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의 관계에 도랑이 있다 해도 선진과 후진이 본의에서 하나가 되어있음은 의심할 바가 아니라고 본다. 다만 현실의 문제들을 보는 견해가 다르고 해결의 방법에 대한 의견이 다르고 태도가 다를 뿐이다.
이 서로 다를 수도 있는 견해와 방법들이 발전을 위해 하나가 되려면 서로를 존숭하고 인정하며 수용해야 한다. 선진들의 신중함과 후진들의 개혁의지를 함께 수용해야 한다. 이 소통과 수용의 길은 바로 하나로 가는 길이다.
모든 것을 수용하다 보면 질서를 안 지키기 쉽다. 모두를 수용하며 질서를 찾으려면 합리적 제도의 정착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열 사람의 법을 응해 제일 좋은 법을 찾는 공화의 법을 궤도의 제일 목표로 하고 있다. 공화를 통한 지혜의 총화는 합리화를 보장할 것이다.
우리의 선· 후진은 서로 사랑과 정의로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하나 됨은 정의를 바탕한 합리적인 제도의 보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합리적 제도가 날 줄이 되고 뜨거운 정의가 씨줄이 되어 공경과 사랑의 비단으로 짜는 선· 후진이기를 소망한다. 제도와 인정이 함께 하는 보람 있는 삶 속에 후진은 선진을 발판으로 더 큰 하늘을 날고 선진은 후진으로 인해 더 큰 보람을 느끼며 결코 물러남이 아니라 신선이 되어지는 수도의 길에서 선화(仙化)하는 여생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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