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題字)·성산 성정철 법사
성정철
재무부장 시절
총부에서는 죽 먹으며 기관을 설립
빚 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생활

<사진설명: 역경을 헤치며 오늘의 발전을 이룩한 원광중고교>
한 가정의 일이나 사회, 국가, 단체의 일이나 살림을 맡아 운영하는 책임을 짊어진 사람의 애로란 직접 당사자가 아니면 그 뼈 아픈 고통을 모르는 것이다.
무질서한 사회상황, 거기에 경제의 불황은 교단의 살림살이에도 그 영향이 막대하게 미쳐왔던 것이다. 총부 임원들은 먹을 것이 없어 죽으로 끼니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죽이라도 맘껏 먹을 수가 없었고 7~ 8월이면 고구마를 채 썰어 넣고 거기에 밀가루를 풀어 죽을 끊인다.
이 죽을 먹게 되면 소화기능이 약한 사람들은 속이 쓰려서 어려움을 겪었고, 한창 일할 청년들은 배고픔을 견디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여기다가 땔감도 귀해 겨울이면 또한 추위를 견디기가 못내 어려웠다. 북일면에서 캐낸 토란으로 겨우 땔감 해결을 해나갔다. 이 토탄 불을 피우고 나면 얼굴 모습은 말이 아니게 된다. 어느 때인가 지금의 상주선원 교무방 부엌에서 토탄 불을 피우다가 가스가 폭발하여 방들이 위로 치솟았다가 내려 앉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간혹 나무를 사기 위해서 진안과 관촌 쪽으로 가야 하는데, 한 번씩 가서 사오려면 정말 기가 막혔다. 비싼 가격도 가격이지만 쉽게 구입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종사님 당시에는 땔감나무도 2~ 3년씩 쌓아놓고 땔 수가 있어 훈훈한 총부 분위기였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전국의 무질서한 벌목 사태로 인하여 나무가 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단적으로도 사업을 넓혀가는 과정이라서 경제적 짜임새가 여유가 없었다. 시내에 설립된 중· 고등학교와 대학, 고아원 등 개교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기관을 벌이느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죽을 고생을 다했던 것이다.
이런 진통 속에서 살림살이 책임을 진 나로서는 고통스러워 하루에도 몇 번씩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한 가지 신념이 있었다. 이토록 못 먹고 못 입고 기관 설립에 고충이 많아도 빚을 얻어 써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결실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지방교당에서 교금이 들어올 예산으로 빚을 얻어 난관을 모면한다면, 그 당시는 조금 부드러울지 모르지만, 이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면, 결국 빚만 남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기에 나는 예산이 책정된 범위 내에서 집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간혹 딱딱하다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을 물을 막아놓고 품어서 잘못이 나의 경제수완은 「막고 품는」재주밖에는 없었다.
해방 전만 해도 총부 운영을 거의 영산에서 농사지은 것으로 해결을 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총부 운영 경비는 전국 각 교당에 교금을 배정하여 그것으로 메꿔 나가던 실정이었기에 더욱 나는 모험(?)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어려운 현실에서 특히 3~ 4년 간의 숨 막힐 듯한 고비를 그래도 무난히 넘기고는 재무부장식 사표를 내고 당시 재방언 공사(원기 40년 10월 시공)가 진행된 영산으로 가서 일 년간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총부 재무부장으로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나의 계획이나 내 주견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내 생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공의에 따라 대의를 좇아야 했고 공명에 순응하는 전무출신의 사명을 어기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총부에는 이리 시내에 있는 삼중당 한약방에 투자한 부채로 인해 퍽 곤경에 처하여 있었다. 나는 모자라는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다행히 이 일은 교단에 손해는 없이 해결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때 「진리가 무심치 않구나.」하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남에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결과가 나쁠 수 있겠는가? 하늘이 우리를 도와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자를 건져주듯이 보살피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또 원광사의 복잡한 일도 그런대로 잘 처리가 되었다. 그런데 원기 51년에 있었던 원광 중· 고등학교 사건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홍역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그 때 나는 10년은 감수한 것 같았다.
그 당시 재무부장으로 있었던 나로서는 사건의 수습을 위해 재단이사장직을 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의 인감 하나면 통하지 않는 데가 없었다. 아무래도 원불교라는 신용 있는 교단의 이사장이라는 명분 때문에 어디서든 인감만 내밀면 빚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욱 어렵고 무섭게 나의 직책을 감내했으며 이러한 직책 때문에 재판소에 불려 다니기도 해야 했었다.
때때로 거리에서 채권자들에게 당하는 창피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채권자들 중 남자보다도 여자들이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다 가슴 아픈 것은 빚 정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교단의 재산을 팔아야 했을 때,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애써 이뤄놓으신 선진님들에 대한 죄송스러움은 한량이 없었고, 내 자신의 살을 베는 듯한 인고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는 순경 보다는 역경에서 「지극한 공심과 정성이면 못할 일이 없다.」는 큰 신념을 얻었던 것이다. 나는 남보다 많이 배운 지식도 없고 별로 뛰어난 역량도 없지만, 오직 사심 없는 정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대종사님 성령이 보살펴 주셨고, 어려운 일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전무출신이란 그냥 모두들 바쳐 버리기만 할 뿐 딴 마음이 조금도 없어야 한다. 마음 가운데 사심이 떨어져야 하늘이 감응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공사를 위해서는 사를 놓아야 하고, 공만 잘 되면 사는 저절로 잘 되는 것이다. 전무출신을 한 번 서원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 회상이 오늘날 이처럼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진들은 대종사님과 선진님들의 근본정신을 터득해야 하고 참 뜻을 알아야 참으로 이 교단을 이끌어 갈 참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려운 총부 살림을 맡았던 그 당시 백수정· 박청수· 유수일· 백상원 교무 등은 총부 임원 중 어느 누구라도 출장갈 일이 생기면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는 것이 다반사였다.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대견한 후진들이다. 이 공부 이 사업을 하겠다는 투철한 서원 일념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들을 아무 불만 없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인가? 남 다른 각오와 신념으로 일관되는 생활이었기에 어떠한 어려움도 감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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