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명
천여래 만보살 배출의 도량 염원
성의 다했어도 천명이나 정업 억지로 해결 안돼
급하고 중요한 것은 심불 조성 일

내가 동산선원에 부임한지 1년 반쯤 되었을 때에 종법사님께서 동산선원을 지어야 한다고 하시었다.   선원 실정으로는 밤이면 숨막히게 자야하고 식사때가 되면 그 방에 밥상을 차리며 밥상을 치우면 바로 이어서 책상을 놓고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건축기금이 마련된 것도 아니요, 교단은 반백년 사업과 남한강일의 뒤였고, 사회적으로도 8.3조치 후여서 불안이 아직 가시지 않는 때라서 나는 실감이 나질 않고 의욕도 나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송림사이가 그립고, 토굴에서나 살아보려는 꿈을 그리고 있는터에 번거로운 일이 달가울 수가 없고 무능하고 주변없다는 것이 겸양의 뜻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서울에 가서도 권선한마디 못하고 걱정만 하니까 곁에서 딱했던지 동산선원 건축공사가 있어서 왔답니다라고 해준다.   의타원 성의철 법사님이 들으시고 교단에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저런 샌님선생님을 보냈을까? 하신다.
6.25 수복 후 교당이 엉성하고 살벌하기 까지 했던 3년간을 단칸방에서 같이 살면서 주변없고 기획성 없는 것을 너무도 잘 경험하셨기에 안타까와 하신 말씀이다.   그러시고는 효성스런 마음에 어머님 이명현님을 위해 과분한 정재를 희사해 주셨다.
구타원 법사님께서는 크게 힘이 되어 주시고 뒤에 동정표로 지었다고 하신다.   나는 그저 왔다 갔다 했는데 사실이 그런것도 같았었다.   김명환 주무님의 희사도 애초에 계획하거나 기대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듬해 2월 25일 졸업식을 보고 오후 기공식에 참석했다가 아무 예산도 없이 설계만 크게해 놓은 것을 보고 딱하게 생각되었던지 그때는 교당에도 잘 나오지 못했던 부군 지금의 종로교도회장 수산 선생과 숙의 끝에 아버님 이법준 선생을 위해서 천여래 만보살을 교육한 훈련장을 세우자고 결의하고 교단사상 처음이라는 하늘이 안다는 거액을 희사해 줌으로써 순조로웠던 것이다.
건축일도 지금 신촌교도회장 최준명 사장과 본래 친분이 있었던지라 친분으로 해서 신세가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걱정만 하니까 염려가 되었던지 기술을 제공해 주어서 조금도 신경쓰지 않게 부족된 것까지 맡아가면서 마쳐 주었으니 결국은 신세를 진 셈이 되었다.
나는 세상물정에도 너무나 어두웠다.   한번은 회계할 때가 되어 송금해온 것을 찾으니 돈뭉치가 제법 컸다.   최회장이 그걸보고 마치 소장수 같다면서 다음은 수표로 해달라고 하란다.   전에 서울에서 수표를 만지기는 했으나 지방에는 없는 것인 줄로 알았던터라, 어이가 없어서 여기서도 할 수 있는 것인가요?하며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해 교무훈련 때 마침 연단에 설 기회가 있어서 선원 실정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웃 수양원 봉불식이 있게 되어 교역자들이 선원을 들려 보고는 여기 저기서 짓기는 지어야겠구먼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교역자들이 집 지으라는 승낙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승타원님이 서울 한번 올라오라고 한다.   나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집 지어주면 가겠노라고 했다.   승타원님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하여간 와봐요한다.
나는 이말에 서울 갈 명분이 섰다.   그런데 좀체로 갈 뜻이 나지 않고 발길이 내키지를 않는다.   매일 가야지 가야지 하기를 2개월여, 12월 말게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착잡한 심경에 막연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나는 누구에겐가 외쳐 보았다.
내가 가는 것은 sor 뜻이나 내 욕심이 아니라 종법사님의 명령에 의해서입니다.   이는 하늘의 명령일 것이요 대종사님과 선법사님께서 계신다면 대종사님과 선법사님께서 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단의 명령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당신님들의 뜻이요, 명령이라면 일의 성  불성은 당신님들이 알아서 할 일이 아닙니까?   정말로 나는 무력합니다.
나는 말없이 부르짖고 사무치도록 기도하면서 서울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여러분의 소중한 재물을 희사 받을 때마다 작고 크고 간에 하나 하나에 정성이 어리고 피땀이 담긴 것임을 피부로 느꼈고 가슴이 뭉클하고 숙연해짐을 어쩔수가 없었다.
  나는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택시 아닌 버스를 이용할 것과 나에게 들어오는 일체 금품이나 호강스러운 것을 향유하지 않으리라 내심에 정하였다.   그리고 비록 나라야 할 수 있다고 맡기셨고 내가 열심히 진행하는 작업도중에 중단하고 물러서라 하시더라도 고집하거나 과열하거나 애착하지 아니하고 툭툭 털고 일어사야 한다는 자세를 아울러 가다듬었다.
첫째 자리이타로 되어지기를 바랬다.   본관자리게 서 있던 묵은 강당을 허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기술있는 이는 기술의 정당한 댓가를 찾아 하고 땀흘려 일하는 장부들은 노력한 보상을 제대로 받아야 하며 한사람도 부상이나 해가 없이 자리이타의 도에 맞게 되기를 염원하면서 대중과 같이 3일간 기도한 뒤에도 염원은 쉬지 않았다.
둘째 조불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도 급하고 법당도 중요했지만 이것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더 급해지고 중요해진 것은 심불을 조성하는 일이다.   만일 웅장한 건물로 만족해 버리고 대중의 실적 변화가 없다면 하등의 의미가 없다.   이 정성이 모아진 집에서 천여래 만보살을 만들어 내야 하겠다는 염원이 절실하였다.
셋째 동참자는 교단의 주인이 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이 일에 정신 육신 물질 기술로 애써주신 분들게 복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더욱 이분들이 교단안으로 들어서고 이 일로 인연해서 신심 공심 공부심이 새로워져 교단의 일꾼이 되고 역사의 주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염원하면서 그래야만 교단적인 보담이 될 것으로 믿어졌다.
무능한 내가 마침내 이런 결실을 얻게 됨을 보고 이는 진리의 뜻과 대종사님게서 짜 놓으신 교단적인 계획이 실현된 것임을 알았고 그리고 진리의 위력과 대종사님 선법사님의 가호의 힘과 종법사님의 법력과 교단의 합력에 의한 것임을 확신했다.   설사 성의껏 했더라도 천명이나 정업은 억지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가 있으므로 오랜 때를 기다려야만 되는 일도 있긴 하지만 믿는 이로서는 누구나 진리의 위력을 내 힘 삼을 수가 있고 성인들의 능력을 내 역량 삼을 수가 있음을 깨닫고 공도자는 모름지기 공명이나 종명에 의해서 사업을 지성으로써만 하면 못 이룰 일이 없으리라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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