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양 이행의 정신
하나되자는게 궁극적 삶
십분의 노력과 팔분의 생활
늘 새롭고 힘찬 중정의 길로 균형이뤄 나가야
나는 항상 뒤에 서겠다는 겸양
봉공 헌신이 생명 행복의 원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두 길이 있다.   다른 사람을 밀어제치고 자기만이 먼저 나아가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의좋게 가는 것이다.   먼저는 경쟁적으로 앞지르자는 것이요, 다음은 호양적 태도로써 함께 살아나가는 길이다.
고홍명이라는 근세 중국의 한 학자는 말하기를  서양은 생활의 물자가 그리 풍부하지 못한 지방에서 문화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생존이라는 것이 제일의 욕구가 되어 어떻게든지 해서 우선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을 밀어제치고라도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경쟁의식이 왕성하게 되었다.   중국의 경우는 물산이 풍요한 황하나 양자강 유역에 문화가 크게 열리게 되어 자연 서로가 양보하는 길이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바른 견해인가 어떤가는 아직 충분히 연구해야 할 여지가 없지 않지만 아무튼 지금의 세상풍조는 만사가 서양류를 따르게 되어 경쟁적이라는 데에는 별로 의심할 것이 없다.   그래서 다른사람이야 어떻든 나문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개인주의(지금은 집단이기주의로 까지)라는 것이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생존경쟁에서 뒤처지게 된 많은 사람들(낙오집단)은 있는 그들이나 없는 나나 매한가지 인간아닌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뽐내고 자셀게 없지 않은가, 다같은 사람인데  하는 등등, 어느듯 방향적 평등의 요구가 팽배하여져서 이 이기와 반항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분열되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이 싸움을 싸움으로써만 해결하려는 것이 싸우는 자들의 타성적 생리이고 보니 이래가지고야 어떻게 인류 생활에 안정을 기할 수 있겠는가.
물론 오늘날에야 그런대로 예전보다는 많이 골라져서 사회적으로나 국가간에 있어서 협동적 공감대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런데도 그 어름장 같은 응어리들이 풀리기에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뽐내고 버티어 보았자 저 혼자만으로는 안된다.   너와 나 우리들 모두가 함께 하고서야 삶이 되는 것이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하는 호양의 정신이 없고서 어떻게 인류의 평화는 보장될 수 있겠는가.   물론 인류사회 공동체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그 누구에게도 뒤져서는 안된다는 각오로써 매진해야 되는 것은 다시 말할것도 없이 소중한 일이다.   가령 귀중한 학문의 연구에 있어서, 또는 사회적 개혁과 같은 것은 가장 앞장을 서주지 않으면 안되는 선진적 기개라야 겠지만, 사회공동적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는 함부로 다른 사람을 배척하거나 다른 이를 밀어붙이고 저 혼자 차지하겠다는 것은 이성과 품위를 존중하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하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한걸음을 양보하는 것이 덕이 된다는 것이다.   한 걸음을 양보하는 여기에서 품위 높은 인간의 향기를 듣는다.
노자는 삼보를 들어 말하였다.   왈자 왈검 왈부감위천하선이 그것이다.   자는 자비의 자인데 어버이 같은 사람의 마음이다.   검은 자기의 몸을 호지하는 길, 검약의 검으로서 항상 삼간다는 것, 다른 사람 앞에서 과장하지 않고 물건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십분을 다하지 않고 팔분으로 자족한다.   열흘 붉은 꽃이 없이 달도 차면 기운다는 속담도 있듯이 욕심껏 가득 채우고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결손이 오기 마련이어서 탐욕은 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십분의 노력을 하고 팔분의 생활을 하면 그 생활이야말로 안정된 생활이라는 것이다.   노력은 칠, 팔분이나 하고 생활은 십분의 만족을 취하려드는 것이 오늘날의 불균형 요인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다음 불감위천하선은 세상을 앞질러 가지 않고 나는 항상 뒤에 서겠다는 겸양의 몸가짐이다.   이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 할는지 모르지만 한 걸음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설 줄 아는 것은 백보앞을 내어딛는 진화의 기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두발로 걸어다니는 것이 인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이 걷는 것은 한 발이 앞으로 나왔다면 한 발은 뒤에서 멈춰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 바꿔가며 나오면 멈추고 멈추면 나오는 것이 우리들의 정상적인 걸음걸이인데도 경쟁  성패를 의식하는 나머지 초특급으로 달려야 할것만 도모하고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다면 종당에는 무너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요즈음은 걷는게 아니라 마구 달리고 날아다니는 세상이 되어서 달리는 탐욕과 나는 탐욕의 그 충돌사고는 더더욱 대형화되어 가고 있다.   인간의 안목은 곧잘 천리의 앞을 내다본다지만 한걸음 내어딛는 여기서부터 공동체를 의식하는 질서는 바른 척도를 가늠해줘야 한다.   나아가고 멈추는 그 인생의 걸음걸이가 마침내는 늘 새롭고 힘찬 중정의 길로 균형을 이뤄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말의 저의는 이해관계에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서로가 좋다는 방법이라는데서 수긍하나 그 궁극적인 뜻은 자타와 이해를 초월한 그러한 차원이 아니고는 자리이타라는 보편타당한 이행이 나올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리이타는 상반되는 개념이나 방향이 아니라 하나의 기틀이다.   남을 이롭게 하고서 어떻게 자기가 이로울 수 있는가, 자기가 이롭고서 어떻게 다른 사람이 이로울 수 있는가, 이것은 서로의 아집  독선이 빚은 모순 대립이지 이행은 아니다.   나의 이익이 곧 저 사람의 이익이요, 저 사람의 이익이 또한 나의 이익이 된다는 진리관으로 서로가 하나되는 뜻을 깨닫지 않고서는 자리이타의 공정성 그 주체는 서지 못한다.   이행은 곡 하나가 되자는(공동체) 생활이다.   궁극적 삶의 가치다.
곱장니 빚을 내어 일푼이나 남는 장사를 한다면 그 사람이 어리석은 줄은 알면서도 공중의 소유를 축내어 제가족 몇을 돕는다면 그 사람이 더 크게 어리석은 줄을 아는 이는 적으며 몇되 종자로 몇섬 곡출을 얻는 것이 농사인줄은 알면서도 적은 공덕이라도 공도에 지으면 몇십배의 큰 복이 돌아오는 것이 인과의 이치인줄을 아는 이는 적으니 어찌 참다운 이해를 안다 하리요.(정산종사 법어 원리편 50)   자기만을 위하여 계획하고 도모하는 것이 반드시 자기를 위하는 길이 될 수 없고 공도를 위하여 이행하는 길만이 장차는 크게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행복과 생명의 원천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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