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감은 넘치는데 광주교구 담양교당
한문 야학 통하여 청소년 교화
유아원교실 신축이 당면 과제
풍우가릴 교실을…

천변유아원. 마침 오전 시간이 끝나 점심을 먹는 시간이 되었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 사이로 수저를 들고 특별히 마련한 수제비를 앞에 놓고 병아리들처럼 옹기종기 모였다.
창고 같은 교실 한 칸에 75명의 원아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오후 3시까지 머무는 교육장이다. 교실이라기엔 너무도 협소한 장소. 그것도 월 10만원의 집세를 물어가며 진행하고 있는 유아원이다.
이 천변유아원은 담양교당 부설기관이다. 원기 68년 어느 개인이 운영하던 것을 1백20만 원에 인수 2백만 원을 들여 시설을 갖추고 어린이교화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자금 없이 시작한 유아원. 오직 열과 성으로 교사와 원장의 일심합력만으로 이끌어 생생한 교육의 터전을 닦아오기 2년의 이르렀고 이 결과 담양 읍내 9개의 유치원과 미숙학원 등이 있지만 원아들은 천변유아원으로 몰려오게 되었다.
금년에도 1백여 명이 넘게 원서를 들고 왔지만 교실부족과 놀이터 미비 등으로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시설 때문에 안타깝게도 선착순으로 75명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애로는 이에 끝나지 않고 있다. 기독교인인 집주인의 성화같은 독촉, 이런 저런 시비로 인해 도저히 그곳에서의 교육이 어렵게 되었다. 시급하게 부딪친 난관은 유아원 교실 신축이다. 도시속의 교육 경쟁 장처럼 화려한 교실을 원하지는 않는다. 바람과 비를 막을 수 있고 유아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교육시설이면 족하다.
혈심정성의 교화현장
담양교당은 원기 55년 8월 5일 권일경 (중앙수양원)법사께서 겸면 교무로 재직할 때 월1회 출장을 시도하였다. 그 후 원기 57년 3월 30일 창평교당을 연원교당으로 하여 담양읍 천변리에 전셋집을 얻고 선교소 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때 당시 창평교당 김성덕(고인) 주무의 특별희사금 5만원이 큰 힘이 되었고, 점차 선 도량으로 뿌리를 내리고 교화의 정착을 위해 원기 59년 5월 26일 봉불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교세의 부진으로 담임교무를 모시지 못한 채 윤정운, 박영식 순교감님과 최규학(당시 순창), 박진흥(당시 창평)교무의 순번 출장법회로 명맥을 이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난항을 하면서 원기 61년 5월 1일 권일경 법사의 혈심노력으로 천변리 193~3번지 대지 47평에 건평 20평의 가옥을 1백54만원에 매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63년 4월 10일 초대교무로 장선거(중앙수양원)법사가 부임해서 1년 동안 교화를 주재하였다.
1년이 지난 64년 3월 6일 제2대 박정혜 교무가 발령을 받아 부임하였고, 이득정 ㆍ 김송덕 ㆍ 김선훈 ㆍ 박주영 ㆍ 유여은씨 등을 주무로 발령하여 교화체제의 틀을 갖추었다. 그러나 창립의 어려움은 다른 지역 못지않았고 협소한 교당과 지역적인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20평 가옥의 교당 건물을 매매하고, 그동안 허리끈을 졸라 모았던 기금을 합하여 천변리 193~17, 18번지의 대지 1백56평을 1천5백60만원에 매입, 교당 터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래서 법회를 보아야 할 곳을 물색, 현 교당을 1년에 80만원의 사글세로 얻어 법신불을 모셨다. 이런 상황에서도 학생회와 어린이회를 결성하였고, 청소년을 위해 2년 전부터 야학을 열어 「명심보감」과 「천자집」등 한문교실을 실시하여 매일 50명씩이 출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혜 교무는 과외공부 단속법에 저촉되는 것 같아 그냥 진행할 수 없음을 느끼고 교육청을 찾아갔다. 영리를 목적한 것이 아니고 봉사와 교화가 목적이었지만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한문학원」으로 인가를 받으려 한다고 의견을 밝히자 한문학원은 대단히 조건이 복잡하고 어려우니 「붓글씨 과외교습소」라는 특별 허가서를 받아가라고 하여 지금 남의 집 대문에는 교당간판과 함께 「붓글씨 과외교습소」간판이 걸려있다.
담양교당은 한시가 급하게 되었다. 매입한 대지에 아이들이 공부할 교실을 지어줄 특지가는 없을까? 자모회 모임도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 유아원에 봉사하는 주연석(광주청년회원) ㆍ 임문례 교사의 낱 없는 정성이 담양사회의 어린이교육에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그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죽세공예의 명산지
담양은 전국 유일의 죽림 주산지이며 전통적 죽제 민예품의 명산지이다. 담양에 죽세공예가 시작된 것은 약 4백여 년 전 전주지방에서 이사 온 김씨란 노부부가 만들었다는 참빗(眞梳)을 시원으로 발전되었다. 전국 죽림면적 중 19%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담양토질은 왕대 ㆍ 솜대 성장에 알맞고, 죽질의 강인성 ㆍ 탄력성 등이 세공에 알맞아 죽세공예가 시발된 것으로 전해진다.
대의 굳음은 덕을, 곧음은 입신을, 죽공심은 도를, 마디가 곧게 맺어있음은 입지를 뜻한다하며 의식주 및 농사 전쟁 등 생활용구로 각광을 받아왔다. 이 담양읍에는 인간문화재 제 31호인 낙죽장 이동연옹과 인간문화재 제 53호인 채죽장 김동연옹이 계신다. 그래서 이곳에는 죽물박물관과 죽물시장이 있어 상당한 수입도 올리고 있다.
이 외에도 천혜의 자원과 송강정 등 명승지가 많아 전통문화의 유적이 다민 곳이다. 이 고장에 하루 속히 일원의 새로운 도량이 건설되어져 많은 생령들의 구원의 전당이 되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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