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고뇌를 체험 송 자 명①
오랜 기관 근무 끝에 부임한 교화현장
가난한 농민들의 정신 ㆍ 육신 ㆍ 물질에 많은 도움
많은 환자들 돌보며 전법의 뿌리 내려
농천 상담자로

5월은 청소년의 달이다. 해마다 맞이하면서 느껴지는 것은 세월의 무상 앞에 푸르렀던 내 지난 청소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대종사님 앞에 출가서원을 올리고 초기교단의 한 모퉁이에서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안고 살아왔던 나.
이제 선진님들 보다는 비교도 안 될 많은 후진을 둔 입장에서 때로 비과학적이고 ㆍ 어설프기 이를 데 없는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연륜을 보태어온 나날들이었다고 행각한다. 원기 25년 당리교당 감원으로부터 출발한 내 전무출신 생활의 시작은 험난한 파도를 항해하는 선장과도 같았다.
나는 전주 ㆍ 화해 ㆍ 초량 ㆍ 원평 교당 부교무를 거쳐 중앙요양원과 동화병원(현 공익부) 이사 등을 역임, 원기 48년 수계교당 교무로 부임하게 되었다.
오랜 동안 총부와 기관에서 근무하다가 접하게 된 일선 교화현장, 그때만 해도 교세는 미약했고, 특히 농촌의 실정은 비문명지대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어둔 곳에 밝음을, 열리지 못한 귀에 법음을, 뜨지 못한 눈을 뜨게 해줄 것인가 막막하고 답답했다.
우선 육신병 치료에 착안하였다. 농민들에게는 멀고도 높은 것이 병원의 문턱이다. 나는 이 높은 문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약간의 의학상식을 동원, 적극적인 진료에 나서게 되었다. 나는 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2년 동안의 병원근무 실력으로 그들의 아픔과 가통을 최소한 달래줄 수 있었다.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수계리 일대에 퍼져갔고 그래서 하루에 평균 10여 명의 온갖 환자들이 찾아 왔다. 택시가 아닌 수레를 타고 오는 중환자도 있었다. 나는 대강 초진찰을 하여 전주도립병원이나, 이리 김 외과로 보내면 거의가 병명이 맞았다. 때로 농약 중독환자도 실려와 링겔을 꽂아주고 회복하여 걸어 나갈 때면 나는 더 없는 보람을 느꼈다.
교화란 얼마나 힘든 정신작업인지 모른다. 이념에 따른 실천이 있을 때에야 감동을 받게 되고, 거기에서 귀의처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면한 육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정성을 다했더니,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니 스스로 입교절차 밟기를 서두르게 되었다.
나는 의사 아닌 의사가 되었고 영험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기가지에 이르렀다. 이런 교당 분위기는 감원까지도 내가 외출 시에는 조제를 해주기도 하였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지 일요법회 때면 법당이 비좁아 마당까지 자리를 펴야 했다. 나는 잠시도 앉아 잇을 틈을 내지 못했다. 밀려오고 그들이 정신 육신 물질에 대한 상담까지도 도맡게 되어 때로 의사이면서 동네구장이 되었고, 설교하는 교역자가 되었다.
내가 이렇듯 진료에 나서게 된 것은 교단적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일제말의 막바지 압박 속에서 우리 여자 전무출신들은 총부에서 집단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라 잃은 서러움은 한국 여성들에게 치욕의 역사를 가져왔으니 정신대라는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언제 이 회오리바람이 우리에게 불어 닥칠지 예측할 수 없었던 난세, 이런 시국을 탓하기에 앞서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나를 비롯한 6명의 도반들이 당시 팔타원 법사님께서 경영하셨던 서울 동대문 병원(현재 이대부속병원) 간호원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경험을 통해 얻었던 의학상식을 밑받침 하여 수계교당에서 활용했던 것이다. 가난과 싸워야 하는 농촌의 현실, 교통의 불편으로 그 당시에 택시를 불러 병원에 가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교통비와 진료비의 절감으로, 그러면서도 용하게도 약효가 있던 빨리 회복되어 교당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5~6 동네가 한 동네 되어 일치단결로 교화의 한마당을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가 처음 병원으로 떠나게 되자 정산 종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표준을 놓지 않고 살아라고 당부해 주셨다.
①정직 ②근면 ③관대 ④진실 ⑤불류세속 하라고 말씀하시고는 세속에 살아도 세속에 흐르지 않고 대종사님 법 어떻게 이어 나갈까, 염염불망 하면서 생활하라고 거듭 촉구해 주셨다.
이 말씀은 서울 병원생활에서만의 표준일 수 없었다. 내 생애의 지표였고, 수도인으로서 삶의 방향이었다. 언제나 가슴속 깊이 담겨진 법문, 교화의 현장에서 더욱 새롭게 나를 다져주는 스승님의 훈증이었다.
의식교화의 보람
수계교당은 원기 27년 총부에서 경영했던 삼례과원에서 출장소 간판을 걸고 예회를 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원기 35년 드디어 교도들이 혈심노력으로 법당 신축에 착수했지만 6 ㆍ 25를 맞아 잠시 중단했다가, 고현종 교무의 부임과 함께 다시 추진하여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런 터전을 기반으로 나는 별 불편 없이 교화에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날이 불어나는 교도님들, 법회출석수는 1백50여 명에 이르렀고, 교도 ㆍ 비교도를 막론하고 초상이 나면 교도님들과 함께 문상을 가는 것이다. 비교도일 경우 문상을 마치면 동행했던 교도님께서 상주에게 『이왕 교무님께서 오셨으니 독경이나 하실까요?』하면 거의가 故人 위한 일이라 하도록 했고, 이것을 계기로 종재까지 모시게 되었으며 입교도 하는 예가 많았다.
수계교당에서 의식교화는 애경 간에 수없이 진행되었다. 결혼예식장이 마땅치 않아 삼례읍까지 나가야 하는 실정이었으므로 대부분 사람들이 우리 교당을 많이 활용하게 되었다.
나는 이 결혼식을 위해 예복을 준비해 놓았고, 피아노가 없었기 때문에 녹음테이프에 웨딩마치를 녹음 해다가 틀었다. 이때 웃지 못 할 일은 녹음테이프 점검이 안 되어 중간쯤 풀어진 테이프를 틀어 당황하기도 했던 일은 기억이 새롭다 따라서 나는 주례까지 겸하게 되었다. 주례사는 주로 「信和頌」을 내용으로 하였다.
남보다 크지도 않은 내 체구에 주례를 한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격에 맞지 않았지만 일단 정성과 교화일념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게 주례를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하는 날이 돌아왔다. 어느 시골 갓 쓴 할아버지께서 결혼식장에 참석 하셨다가, 하시는 말씀이 『그 선생 시집도 안 갔다면서 사랑 얘기를 어떻게 해』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후로는 주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부분 농사를 짓는 교도님들은 곡식 수확기에 쌀이나 보리를 유지비 겸 보은미로 가져오므로 나는 쌀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려에 소요되었던 약간의 약값 이윤으로 그 당시 50만원의 몫돈을 마들어 원기 54년 식당 채를 짓게 되었다. 교당일로 인해 교도님들께 성금받기 위해 구차한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쌀계가 끝나자 그 모아진 돈으로는 유지답인 논 1천 평을 사들였다.
그러나 나는 사업권장에 설득력이 없어서 교도님들께 사업을 많이 시키지 못하는 내 취약점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교도돌이 다른 교당에서 총부와 각 기관 사업내용을 듣고 이야기하면 그때서야 말문을 열었으므로 큰 사업을 못한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 너무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다른 사람에게라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 교화자의 역할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 일이 그렇게 잘 되어지지가 않았다.
<법사 ㆍ 동래수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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