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ㆍ 25 전쟁 35주년

해마다 6월이 돌아오면 우리들은 교단적으로 국가적으로 두 가지의 충격 사건에 대하여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가 대종사 열반이고, 그 다음이 6 ㆍ 25전쟁이다. 대종사 열반 42주년과 6 ㆍ 25전쟁 35주년을 맞는 요즈음 6월 한 달을 「추모의 달」로 정하여 교단과 국가의 입장에 이 역사적인 사건을 마음속으로 되새기고 있다.
1943년 6월 1일에 겪었던 대종사의 열반은 당시 우리교단에 있어서 천지가 무너지는 비탄과 좌절이었던 것은 말할 것이 없다. 대종사의 열만은 흔히 세속적인 관례로 자연사라 하지만 그 시대적 상황이 일제식민지 작태가 말기현상으로 치닫는 판국에 여기 교단의 존폐문제가 함께 겹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가고 있는 극한적 처지의 복합적 관계를 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대종사의 열반은 대종사께서 평소에 일러 오신대로 「수양 길 떠난다.」는 예시의 배경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오히려 무명과 암흑의 세계에 평화와 상생, 진리와 개벽의 횃불을 더욱 드높이는 새 역사의 장으로 거연히 승화하신 사실적 의미를 이 격동하는 시대 앞에서 우리들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대자연의 순환 속에서 그러나 역사적 변칙의 회오리 속에서 대종사는 가셨다.
이렇듯 대종사의 열반이 일제 질곡의 변칙적 역사의 돌풍 속에서 감연히 시적(示寂)된 것이라면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동족상잔의 사변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의 조국 땅에서 빚어진 동질민족의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5 ㆍ 6천년의 인류역사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상극 침략의 전쟁으로 누벼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동질민족끼리 골육전쟁을 일으킨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는 그 누구에게 물어봐도 세계적인 일대 치욕이다. 이제 와서 누구가 잘하고 누구가 못하고 누구가 침략자고 누구가 피침략자고 평화주의자고 따지는 것은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 원인행위야 어디 있든 우리들은 역사적 동질민족으로서 지금 바로 우리가 분단민족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뼈아픈 반성과 자각의 인식이 절신한 것이다.
과연 그 누구가 오늘날 우리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그러나 그 누누가 어떻게 우리들을 만들어 놓았든 간에 지금 우리민족의 처지는 어쩔 수도 없이 우리들 자신이랄 수밖에는 없다. 어찌됐든 우리들은 우리들을 갈라놓은 이 분단의 비극을 스스로가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 같이 한 자리에서 만나고 한 마음으로 화해하고 3천리 이 강토가 거듭난 겨레의 새 쌈터로서 세계적 사랑의 이 한길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도록 통일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분단의 이 통절한 비극을 무엇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것은 곧 통일하라는 역사적 지상명령이다. 분단 속에 통일은 이미 와 있는 것이다. 통일문제는 어디까지나 인류적 민족적 양심이며 역사적 최대과제일 뿐 아니라 그것은 마침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세계」의 정초(定礎)가 되는 개벽역사의 첫 과정이다. 이제 어떠한 강자의 지배철학이나 노예윤리라는 것은 그 언제 어디서도 통할길이 없다. 그것들은 마치 다 삭아버린 사닥다리와 같은 것으로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독선적 생태는 선천시대 상극의 잔재로서 치워버리지 않으면 안 될 장애물들이다.
문제는 강대국의 외세로 그것이지만 동질민족으로서의 차원 높은 긍지와 자각 대전협동의 우주사적 대 사명을 성취하는 역사의 현장이 여기서부터 라는 역사의식 속에 통일이 있고 미래의 밝은 방향이 있다는 소신을 갖고 행동하는 통일의 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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