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은 교리주장논의가 늘 새롭게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유익한 신문
종교신문은 잘한 일 많이 드러내야

대학발전에 헌신한 삶 한점 후회없이
남은 여생 전국 순회하며 대종사님 법 전할 터
 
원불교신문 창간 26주년을 맞아 본사 초대사장을 역임했던 문산 김정용 원로교무를 만나 원불교신문 창간 당시의 상황과 변천 그리고 자신의 삶과 신앙에 대해 들어 보았다.
 
 원불교신문이 걸어온 길
 -원불교신문(당시 원불교신보)은 원기 54년(1969) 6월 1일 창간 됐습니다. 월간 원광이 원기 34년에 창간된 것에 비해 신문은 늦게 창간 되었는데 그렇게 된 이유와 창간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교단은 대종사님 재세시부터 월말통신회보를 발간하는 등 언론에 대한 간심이 많았습니다. 교화와 대외홍보에 있어 신문의 필요성은 절실했지만 그 당시 형편으로는 엄두를 못냈지요. 나라 전체의 수준도 그랬지만 교단적으로도 상당히 어려운 때였습니다. 인력, 재정 등의 이유로 미루어졌지요.
 그러다가 우너기 53년 신문발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구체화되어 이듬해인 원기 54년 3월 1일 원불교신문사를 설립, 주정원 자리에서 역사적인 출발을 했습니다. 창간호는 6월 1일 격주간 월12면 타브로이드판으로 4천 5백부를 발행했어요.

-원불교신문 창간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박백년기념대회를 앞두고 교단의 대사회적 관계나 시대변화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잡지만 가지고는 안된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어요. 그래서 우선 격주라도 신문이 나와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필요성에 비하면 만시지탄이었지만 오늘이 있도록 이끌어준 뿌리라고 생각하니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민족종교소서는 처음일 것빈다. 자부심도 대단했지요.

 -원불교신문은 격주간 발행에서 월 3회 발행하는 순간(원기 66년)으로, 다시 주간(원기 77년)으로 발행되어 작년부터 월 첫주는 8면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신문의 변천과 본지의 방향에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격주간에서 순간으로 발행하는데 11년, 순간에서 주간으로 발행하는데 12년이 걸린 셈이군요. 신문은 새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격주간이면 독자들은 거의 한달 지난 기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창간 당시에도 순간, 주간으로 발행해야 할 필요성은 느꼈지요. 어쨌든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신문의 종류도 많아졌고 지면이 대폭 증면되어 지금은 상대적으로 우리신문이 왜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 주간 8면을 발행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러려면 인력과 재정의 지원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교도님들의 적극적인 성원이 있어야 하겠지요.

종교신문의 역할

 -종교신문으로서 원불교신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요즘 언론은 지나치게 은선양악 하는 것 같아요. 악을 자꾸 들춰내면 사람들은 도덕 불감증이 생깁니다. 물론 비판기능도 필요하긴 하지만 건설적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특히 종교신문은 잘한 일을 많이 드러내야 합니다. 교단의 기관지로 교화에 도움을 주는 신문이 되는 일과 환경통일 등 민족의 시대과제 해결에도 동참하고 개벽된 미래사회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재 본지의 편집방향이나 기사 내용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십시오.
 대체로 잘 하고 있습니다. 신문이 많이 밝아졌고 기사에 균형이 있습니다. 교도들의 여론수렴하는 난이 있으면 좋겠어요. 지면이 부족하고 기사가 너무 많아서인지 편집이 갑갑하게
보이는데 사진을 많이 쓰고 여백이 있으면 좋겠지요.

 -본지가 보도기능보다는 기획기사의 비중이 높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신문과 잡지의 구별이 없어지는 쪽으로 가는 것이 언론의 추세입니다. 교화에 도움이 되고 많이 읽히는 신문이 되려면 형식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신앙수기도 신문에 연재되면 기다려지는 매력이 있잖아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인과와 고생철학이 뒷받침

 -올래 정년퇴임 하셨지만 전무출신 후생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계시지요. 후생대책 위원회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후생대책위원회는 교단의 미래가 걸려있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과 같은 교역자 후생대책으로는 앞으로 교역자를 양성하기 힘들 것입니다.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해 주는 쪽으로 물꼬를 트고 있습니다.
 대산 상사님을 비롯한 원로님들과 제 정토회원(김성윤)이 합력해서 기본기금은 마련했지만 앞으로 힘을 모으고 적극 추진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 교단적으로 많은 일을 하시면서 숱한 경계를 이견낸 것으로 압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는 15세에 대종사님을 배알한 후로 한평생을 교단에, 그 중에서도 대학발전에 바쳤습니다. 그런 과정에 넘어오는 간을 삼킨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한일은 거의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인과에 대한 신념과 고생철학이 뒷받침된 것입니다. 내가 거둔 성과에는 반드시 그만큼 나의 노력과 대가를 지불한 것이지 거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대종사님과 정산종사, 대산상사, 숭산종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대학발전을 위해 헌신했으니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내 인생에 대해 한 점의 후회도 없습니다. 법신불 사은과 스승 동지들에게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성불제중

 -대종사님을 직접 모시고 훈증을 받으셨던 선진님으로서 후진들에게 보감될 말씀을 해주십시오.
 대종사님의 법문은 너무 쉽습니다. 누구나 도인되는 공부법을 쉽게 알려주셨어요. 바로 일심알음알이 실행의 삼학공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삼학공부 잘하고 사회적으로는 감사생활하고 사요 실천하여 복짓는 생활을 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후진들을 보면 너무 쉬워서 그런지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자꾸 어렵고 신기한 것만 찾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성불제중하여 대각도인 되는 것이 주목적이지 다른 것이 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실행력을 기르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공부표준은 무엇인지요.
 올해 정년퇴임 했지만 공부에는 정년이 없지요. 이미 익은 것이니 평생 해오던 대로 정진하고 있습니다. 계문 교칙 선 등 일과를 기쁘게 지키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저는 대종경의 법문을 현장에서 보고들은 산 증인입니다. 그 말씀을 받든 원로들도 이제 몇분 안 계십니다. 우리들이 열반하면 이제 영영 확인할 길이 없지 않아요. 그래서 올해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대종사님께 받든 법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미 경남, 익산지역은 마쳤고 6월 4일에는 군산에서 법회를 봅니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젊을때부터 꾸준히 요가 선을 해와 건강은 아직도 자신 있다고 한다) 이 일은 계속 할 것입니다. 이 일은 대종사님을 배알한 내가 해야할 일 아니겠습니까. 지역별 합동법회 형식으로 요청만 하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이것은 제 여생의 마지막 보은사업입니다.

 김정용원로교무는 원기 10년 정읍 화해리에서 출생, 15세에 출가, 5년동안 대종사님의 훈증을 받았다. 원기 36년 군산교당 교무를 지낸 후, 원기 41년 원광대학 강사로 교육사업에 투신, 교무처장 부총장 총장(원기 7279)으로 재직하면서 원광대학교를 명문사학으로 발전시켰다.
 원불교청년회장 반백년기념사업회 사무장 원불교신문사장 수위단원을 역임했고 미륵사상연구로 대종사님이 새시대의 미륵불임을 학문적으로 천명해싸. 올해 정년퇴임하여 전국 순회설법으로 대종사님의 법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면서 노후 수양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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