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시절
관음신력으로 병 낫자 온 장안에 소문
관음보살이 준 감로수

지금도 우리 모녀가 사는 수양원 방에 해수 관음보살님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지내지만 나는 이 관세음보살님의 은덕을 잊질 못한다.
내가 열굴을 다쳐 급성 뇌막염으로 몸져 눕게 된 것은, 어쩌면 불연의 소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처녀로서 얼굴은 생명이랄 수 있는데 하필이면 얼굴을 상한 것은 부처님 당신곁에 날 부르심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세브란스 병원에 가니 급성뇌막염이라며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해도 24시간 안에 죽는다고 한다.   나는 수술을 거절했다.   24시간 안에 죽을 바에야 수술해서 무엇하랴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모녀는 생각하였다.   기왕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용성스님을 뵙고 최후로 불공이나 하자며 포교당에 갔다.   사색이 된 나와 근심어린 어머니를 보고 공양주는 방금 누구 불공 올릴 마지(불공밥)를 대신 우리 불전에 올려 공을 드리게 하였다.   불공을 하고 난 뒤 우리 모녀는 한 가지 결심을 하였다.
약도 소용없고 수술도 소용없으니 부처님만 믿자 하고 나는 무시 간단으로 관음 주력에 힘썼다.   다행 관세음보살님의 은덕인지 나는 24시간 안에 죽지 않았다.   오른쪽 얼굴은 문드러져 썩어가기 시작했다.   광대뼈와 이빨이 썩기 시작하였고, 눈 귀 코 입으로 고름이 나 대야로 받으면 하나 가득 찼다.
학교를 쉬고 1년 내내 몸져 누워 치료를 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나는 병석에 있으면서 이 고통을 잊으려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늘 관음 주력을 하였다.   이때는 간동(외가집)으로 옮겨 살았는데 창밖으로 북악산이 보였고, 나는 시름없이 북악산을 우러르며 관세음을 불렀다.
하루는 내 눈에 정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났다.   오른손에 감로수 병을 들고 북악산 한 골짜기에 그 감로수를 붓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 나는 어머니께 간청하였다.
어머니, 날 살려 주려거든 북악산 저기 가서 약수물 떠 오세요
북악산에 약수터가 어디있니?
나는 약수터 위치를 자세하게 가리켜 주었다.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나는 그 관세음보살님의 손에서 감로수가 따루어진 장소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간청에 못 이겨 산에 가서 물을 떠 왔다.
어머니, 그 물이 아니예요
창문을 통해 북악산에 올라가는 사람을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러나 내 눈엔 어머니가 산에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고 겨우 산중턱까지 올라가다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까지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다음 날,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동행을 청하였다.   워낙 산이 험하고 무서워 어머니 혼자 그 높은 곳까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딸년도 미쳤지만 너도 미쳤다
그러나 몸져 누운 외손녀의 청이라 외할아버지는 물리치질 못하고 어머니와 같이 산에 올라갔다.   이날은 정말 내가 가르쳐준 대로 관세음보살님이 감로수를 부어 준 곳에 갔다.   그곳에는 겨우 물줄기만 있어 풀잎으로 홈대를 만들어 물을 받아야 했다.   뒤에 알았지만 옛날 어떤 임금님이 난리통으로 피난 중 이곳에 잠깐 쉬다가 물을 잡수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후로 매일 나는 약수를 마시고 약수로 밥을 해 먹고, 약수로 약을 다려먹고, 또 약수로 얼굴과 몸을 씼었다.   그로부터 얼마 가지않아 고름이 엉겼던 얼굴은 아물고 곧 건강을 회복하게 되어 나는 1년만에 다시 학교에 복교하게 되었다.
정작 병이 나은 뒤 전혀 뜻밖의 엉뚱한 일이 생겼다.   북악산 약수로 병이 치유되었다는 소문이 온 장안에 퍼지기 시작하여 내노라 하는 양반은 사인교를 타고 산에 오르는가 하면 연일 약수터를 찾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쳤고, 덩달아 장사꾼들도 성시를 이루었다.   대각교 포교당에서 내는 불교 잡지에도 <관세음보살 신력>이란 제하로 나에 관한 기사가 났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알 수 없는 신기한 일이었다.   그 몇 달 뒤에 대종사님을 뵈었을 때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누구든지 일심을 모으면 그런 신통이 생기는 것이다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루는 대종사님을 모시고 어머니와 나는 쌀을 씻고 반찬거리와 과일을 장만하여 약수터를 찾아갔다.   약수로 밥을 지어놓고 우리 모녀가 산신령님과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하려고 하자 대종사께서 말씀하셨다.
절할 것 까지 없다고 엄하게 말렸다.   그때부터 일체 우리 모녀는 우상을 모시고 절을 하지 않았다.
대종사 입성 촌스러워
박사시화의 쌍둥이 자매인 박공명선씨는 계동 딸네집(성성원)에 살았다.   당시 우리도 계동(큰이모집)에 있었는데 성성원씨 집과 얼마 안떨어진 한 동네였다.
하루는 박공면선씨가 전라도 생불이 오셧다며 가보자고 데리러 왔다.   지난 봄에 전라도 생불님이 오셨을 때 사시화씨가 그렇게 우리집을 드나 들었건만 집안에는 기중이라 외부출입을 꺼렸다.   그것은 큰이모(구타원)가 부군상을 당하고 3년상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을에는 탈상을 하였으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각교 포교당의 독실한 신자인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용성스님만이 견성한 최고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터라 생불님이 오셨다 하니 바짝 호기심은 동했지만 무엇보다도 큰이모가 어디 마음을 의지할데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던 중이었다.   큰이모는 평소 절에는 늙은이나 다니는 곳이라 하고 불교에는 뜻이 없었다.   좀 다른 종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날은 1924년(원기9) 음력 스무엿세날 이었는데 외할머니가 앞장을 서고 두 과부 딸-어머니와 큰 이모는 뒤따라서 창신동엘 갔다.
나는 그 이틀뒤에 어머니가 같이 가자고 해서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따라 나섰다.   우리가 찾아간 창신동은 동대문 밖 조용한 산에 위치한 10여간의 정결하고 아담한 초가집이었는데 이 집은 이동진화씨가 수양을 하기위해 별도로 마련한 수도채였다.
11월24일 음력으로 시월 여드렛날 내가 전라도에서 오신 생불님을 처음 뵌 인상은 이러했다.
우람한 체구에 얼굴에 광명이 나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원만하고 좋은 얼굴이었다.   하여튼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그런데 체격에 맞지 않고 옷을 입으셨다.   옷은 촌스러우나 얼굴은 참 좋으셨다.
후에 외할머니가 옷감을 마련하고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여 옷을 지어 올리니 종사님 펄 좋아하셨다.   새 옷을 입으니 딴 사람 같았다.   이후 어머니는 종사님 열반하실 때까지 옷 수발을 하였는데 어머니 바느질 솜씨가 참 좋았다.   종사님도 성각이가 지은 옷이라 하면 이유가 없었다.   옷이 딱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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