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려운 경계에도 방황하지 않아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가는 잘 모르나 어찌 되었든 만물의 영장이요 소우주라 일컬어지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것도 살얼음 치는 북극이나 숨 막히는 적도의 나라가 아니고 춘하추동 사철 따라 옷을 갈아입는 금강산을 비롯한 우리 조국 산하는 이르는 곳마다 바로 산 법당이며, 지구의 온대속의 노란자위이며 동방의 등불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유명 무명의 수 많은 도인열사와 선비들이 이 땅에 명멸하였고, 일찍 조상들께서는 홍익인간과 인  의  예  지를 중하게 여기시고 하 많은 내우, 외환 속에서도 드높은 예지와 슬기로써 맥맥히 발전하여 왔으며 마침내 우주의 대 순환기에 이르름에 웅비의 나래를 폈으니 어찌 이 땅의 아들로 태어났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별 재간도 없었으나 부모님과 스승님의 지극하신 사랑에 힘입어 참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학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막상 공부래야 응용생물학의 한 부분인 농학이었으나 나름대로 열심히 하여 학교를 마칠 무렵에는 제법 자신도 서서, 고향에 돌아가 조화있는 입체농장을 이루는 멋진 농군이 되고저 하였다.
그러나 스승님과 부모님 그리고 주위 어른들의 간곡하신 하명에 고집만을 피울 수 없어 이어 교단에 서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아이가 애를 밴 격이었다.
그 뒤 선배님과 동료 및 제자분들의 땃한 체온 속에 강의실, 실험실, 현장 및 국내외의 학회 참여등 분주한 외길 27개 성상을 통해서 나의 전공분야의 소중함을 차츰 터득하게 되었고 보람도 느꼈다.
그러던 중 전공따라 서귀포에 있었던 제주대학 농학부에 봉직하고 있을 무렵 마침 그곳에도 법종자가 뿌려져 총부를 비롯 전주 광주 및 현지의 여러 어른들이 땀흘려 가꾸셨으나, 탱자나무에 귤나무를 접목하거나 짐승을 기르듯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 때 내가 입교를 결심한 연유는 8.15직후 이리농림에 다니던 어느해 늦은 가을, 울도 없는 총부의(유일학림 입구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자그마한 감나무에 무르익은 감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 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그때 사회상이 어지러웠으므로) 퍽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후 틈틈이 교전에서 본 단편적인 지식과 주위의 존경하는 분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선생이라는 이름에 팔려 체하는 버릇(상)도 다 못 떼었음은 물론 정작 공부도 부족하나, 그동안 참으로 원만하고 헌신적인 여러 선생님의 은덕으로 멈추고 궁굴리는 공부도 서서히 되었음인지 이제는 좀 어려운 경계에 이르러도 전과는 달리 그다지 방황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이 어찌 교도가 되었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는 일념으로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 대종사님의 가르침 따라 정신개벽을 비롯한 삼동윤리의 구현과 제생의세의 일꾼으로서 미력하나마 공부에 사업에 꾸준히 정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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