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도안교당에서 3년
침몰할 것 같은 두려움 교화계의 첫 발
우연한 인연 계시 받았다며 자기 신도까지 입교시켜
야학 개설하고 백일기도로 정성 모아
불확실한 현장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고 않았던 교당 교무로서의 출발을 통고 받게 되었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도저히 일선교화란 엄두도 나지 않아 못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그때 나로서 나의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원기 44년 봄. 나는 동산선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자유선객으로 전무출신 서원서도 내지 않은 채 그저 이 법이 좋아 수도하는 기쁨 속에 일체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언제까지나 배우고 닦으며 살리라는 막연한 꿈속에 젖었던 나는 영세교당 중에서도 영세성을 면치 못한 신도교당으로 부임하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응산 종사님께서는 당시 교정원장 직무를 대행하시고 계셨다. 그래서 나에게 한두 번도 아닌 일곱 차례나 권고를 하셨던 것이다. 사실은 무산 장성진 법사께서 나를 추천하셨다고 한다.
그때 나는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그러나 어른의 간곡하신 말씀을 끝내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나는 용기를 내어 떠나기로 하였다. 그래도 주위에서는 모두들 나를 가지 말라고 하였다. 공양원도 부교무 경험도 없던 나였기에 조금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교역에 임하는 첫 출발이었다. 마음을 다지고 총부로 들어가 점심 식탁에 마련된 콩국수를 먹고는 체해 버렸다. 가기로 한 날 가지 못하고 몸조리를 하고 있는데 정산 종사께서 「신도안으로 갔느냐」고 물으셔서 나는 「내일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떠나오게 되었다.
마침 원광중학교(당시 여고와 합동)교사들이 버스 한 대를 대절하여 신도안을 간다고 해서 나는 그 버스에 짐을 싣고 오게 되었다. 단일에 다녀가시는 그분들이 되돌아가실 때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떨어지는 것처럼 논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흐르는 눈물은 염치없이도 자꾸만 흘렀다. 내 곁에 같이 걸었던 교도님께서 선생님 그만 들어가시자고 하는 말씀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음으로 듣게 된 「선생님」이란 단어, 그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고 잘 살아질는지. 한없는 미지의 세계에 겁 없이 나선 나 자신을 돌아보니 어쩌면 꿈만 같았다. 그리고 교화라는 생소한 작업에 과연 얼마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을는지. 모두가 불확실한 어려움뿐인 현장에서 침몰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밤이면 산에가 나무하고
우선 2년 동안 비워두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교당을 손질하기로 했다. 어두컴컴한 방을 도배하기 시작했고, 쌀 한 톨 없는 식당 문제는 이웃 교도님이신 세윤씨에게서 해결하게 되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응산 종사님께서 친서를 보내셨다. 「네가 그곳에서 울고만 있다면 그것은 귀양 간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명감으로 산다면 교역자로서 본업을 실현하는 것이며, 제도사업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보고 또 보고 이틀을 울면서 보았다. 스승님의 보살피심, 그 호념에 나는 새로운 용기와 사명감이 솟는 듯했다. 그래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이를 감내하며 일원의 법음을 펴리라고.
이곳 신도교당은 처음에는 남선지부였다. 원기 21년 총부에서 계룡산 용화사 간방에 임시 간판을 부치고 단기하선을 개최, 원기 22년에 이원이화씨 사택으로 옮기고 정식 출장소 간판을 부친 후 서울 요인 지환선씨의 특별한 공심으로 전문 순교직을 갖고 주재하면서 예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기 26년에는 요인들의 일심합력으로 법당을 신축하고 정식 지부로서 승격하였다. 그러나 어려움은 겹쳤고, 교도들은 모이지 않아 연륜은 20여년이 쌓였지만 취약교당으로서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나는 법회를 보기 시작했지만 식순조차 알지 못해 예전을 가지러 총부에 갔었다.
부임하고 며칠 안 돼 총부에 온 나를 본 응산 종사께서는 그만 못살고 되돌아 온줄 아시고 돌아 앉으셔서 나를 안 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답답하고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한동안 울고 있다가 응산 종사님께 『제가 어쨌든 살아 보겠습니다. 그러니 예전이나 한 권 구해 주십시오.』
나는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으로 다시 신도교당으로 오게 되었다. 법회 출석교도는 5~6명이었다. 먹을 것은 물론 땔감도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밤으로 산에 올라 나무를 해다가 때고 살았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 남의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 것이 걸렸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이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가을이 되었다. 교학과 학생들이 계룡산으로 소풍을 황T다. 그 당시 형편이 넉넉지 못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 교화과생들도 넉넉한 여행비로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교당에서 점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소중한 후진들이 내 교당을 왔는데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총 재산인 나락 두말을 모두 찧어 밥을 해 먹이고 특별한 간식이 있을 리 없어 콩을 갊아 주었다. 선주씨(공양원)와 내가 가을 내내 먹어야 할 양식이 한 끼 교학과생을 점심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때 왔던 학생 중 이광정(종로교감)교무가 정산 종사님께 보고 드리면서 『신도교당에 쌀 팔아 주어야겠습니다.』하고 말씀드리니까 『쓸 때에 쓰면 또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상한 인연
한없이 막막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새벽으로 기도를 시작하여 백일동안 정성을 모았고, 야학을 개설하여 한문을 가르쳤다. 약 25명의 야학생들이 교당을 드나들게 되었고, 잠잠하던 주위가 정적을 깨뜨린 듯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는 신기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두계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느라 서 있었다. 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입은 50대 부인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 『신도안에 기도하러 가십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그렇다고 했더니 같이 가자는 것 이었다.
그러나 막상 같이 가자고는 했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아 얼른 버스가 오자 그냥 올랐다. 그랬는데 그 분도 어느 사이에 버스를 타게 되어 동행이 되었고, 드디어는 교당에서 함께 기도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이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처음에는 산으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는데 이분이 3번 계시를 받았다면서 하는 이야기가 또 신기한 것이었다.
이분은 산신령을 찾아 신도안에 들어와 기도를 하곤 했다는 데 어느 날 밤 꿈에 『네 옆에 계신분이 바로 산신령이다』라고 하였다면서 나를 극진히 받들었고 그때부터 초며 향이며 백일동안의 양식을 모두 대주어 살게 했다. 이분은 군산에서 사는 분으로 나와의 우연한 인연이 입교를 하는 계기가 되었고 정법을 만나 전도를 행하는 수행인이 되었다. 법명은 박용운행씨였다.
따라서 용운행씨는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서는 그동안 자기를 믿고 따르던 선도 25명을 나에게 인도하였다.
<법사 ㆍ 남중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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