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받아야 할 얼 버려야 할 유산들
올바른 병행 자세 정신력 지배 강화
표어 특징은 주체성 실현
종교의 본질과 오늘의 종교현상

종교의 본질은 오늘날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으나 나는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인간생활을 이상적으로 이끌어 가려는 조직체계라 간단히 정의하고 싶다.   초인간적인 존재중에 우주와 우리 인간의 근원을 주체로 함은 현재 고등종교의 일반적인 경향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주의 근원에 대한 공경과 믿음 정성의 태도는 현재의 종교인이 되는데 필수적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는 종교를 근원에 다시 결합시킨다하는 해석도 큰 의미가 있다.   인간이 근원과 관계를 맺고 그를 공경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생활을 건전하게 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공경의 대상은 많이 있을 수 있겠지만 존재의근원에 대한 공경 혹은 외경의 마음을 갖는 일은 믿음의 깊고 낮고에 관계없이 중요하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공경은 종교의 중요본질이요 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에 대한 겸손과 공경에서 진정한 종교심이 발생한다.   공경은 이러한 근원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다시 그의 상징 및 현실에 넓혀져 간다.   그러므로 종교의 생활이란 근원이나 진리 혹은 가르침에 대한 공경의 생활이다.
모든 것이 다 공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차별적으로는 대소주종이 있다.   이러한 종교의 바탕에서 현실에 대한 가치기준이 정해진다.   따라서 종교와 현실주의자의 가치기준은 같은 것이 아니다.   토인비는 종교의 본질적 요소와 비본질적 요소에 대해 논했다.   종교에 있어 어떤 것이 본질적 요소이며 영원히 계승되어야 하고 어떤 것이 비본질적 요소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없어져야 할 요소인가 하는 것은 현대의 종교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종교의 본질을 살리는 일은 계승되어야 하고 본질을 죽이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인데 때로는 전통이나 기록을 통해 자체 종교에서 정당화해 온 것이라고도 현재에는 비본질적 요소로 지적되기도 한다.
종교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느냐 하는 것은 간단히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나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커다란 기여가 되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오랫동안 인류의 정신적 기주로서 선악의 가치기준을 제시하여 인류를 깨우쳐 왔으며 도덕화하고 신성화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초월하는데 기여했으며 안정과 통합에도 기여하였다.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종교의 역사를 갖지 않은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 국민도 종교의 도움을 많이 입고 살아왔다.   종교는 인간생활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정신적 양식인데 이 양식의 질에 따라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약점이 있다면 우리는 이 정신적 양식을 질적으로 개선하는데도 신중한 성의가 있어야 하고 그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기존의 것을 과거보다 더 선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종교는 정서적인 측면에서나 지적인 측면 실천적인 측면에서나 의식 및 경영의 측면에서 대중의 만족을 줄 수 있도록 대비되어야 할 것이다.
원불교 교단이 지닌 장단점
상대적인 이야기지만 원불교는 종교적 순수성 때문에 큰소리 없이 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본다.   교조의 탁월하신 인격과 역대종법사의 높은 도덕, 창립정신을 계승하는 희생적인 공도 헌신자들의 덕으로 능력이상의 착실한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새 교단의 순수성이 유지되는 한 교단은 발전할 것이라 본다.   물론 교리체계의 뒷받침과 그에 근거한 정신적 전통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많은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화합을 깨뜨리려는 생각이 교단내에 아직은 없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화합교단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고 그러한 결과는 교단에 대한 공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본다.
일반적으로 적극성과 박력이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시대적 적응의 문제라던가 아직은 산업사회의 일선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적 훈련이 불충분한 점 그리고 제반 제도등도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
인재의 수용 및 개발의 문제, 후원의 문제등도 더 합리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문제이고 근본 정신의 해이문제도 사실로서 받아드려 시정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개교정신의 계승과 반성
개교정신은 영육을 조화있게 병진해 나가되 정신이 물질을 지배케 하여 주종이 바뀌어져가는 정신 물질의 위치를 정상화함으로써 무량한 낙원을 성취하자는 것이다.   영육쌍전은 원불교 개교정신의 근본이념이다.   그러나 영육쌍전은 영육의 조화가 다만 두 가지를 아울러 하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의 지배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정신의 지배력이 강화되지 않으면 인간의 생활을 정상화 할 수 없고 낙원의 생활을 개척할 수 없다.   즉 영육을 아울러 발전시키되 물질의 노예생활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고 독립시키자는 것인데 그것 없이는 인류의 진정한 낙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종경에서 용심법을 원불교 공부의 주된 목표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음도 만물을 선용할 수 있는 정신의 지배력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함이다.   용심법은 만법을 통해다 한 마음을 밝힌다고 하는 정신과는 상응한다.
이렇듯 물질이나 만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맞게 살려 쓰되 정신의 지배력을 바로 세워 자유자재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영육쌍전의 이념을 현대와 미래사회에 잘 실현해 나가기 위해서는 진리적인 종교의 신앙을 통해 정신의 기쁨을 개척해야 되고 사실적인 도덕의 실천을 통해 실제적인 생활의 기쁨을 개척해야 된다.   따라서 마음속에서와 실제 생활속에서 낙원이 두 방향에서 개척됨으로써 영원하고 무량한 낙원이 되게 하자는 것이 개교정신이다.   개교정신의 이념은 너무 뚜렷하고 건전한 방향제시에서 종교전반에 대한 지침도 되고현대생활에 대한 지침도 된다.   이야기하다 보니까 개교정신에 대해서 교리설명처럼 되었으나 어쨌든 이 개교정신이 내포하는 의미는 종교사적으로나 한국사, 세계사적으로나 매우 큰 것이다.
이 개교정신의 계승에 있어서 반성할 점이 있다면 물량적 사고에 너무 비현실적으로 치닫지 않고 현실의 능력과 근본정신을 되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물량적 평가나 외면적 형식보다 내면적 충실에 성공하는 것이 개교정신의 계승이라고 본다.   참 정신이 뚜렷이 부각되는 개인 및 단체가 되는 일이다.   또 진리적 종교의 정체가 더욱 드러나도록 하고 사실적 도덕의 활발한 전개가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추상적 이론적인 면에서보다 생활상에서 응용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응용적으로 나타낸다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체적인 생활속의 방안 혹은 실예로 나타나는 것이 이념 실현의 가장 가까운 길이기 때문이다.
단체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안이 전체정신을 대변하는 좋은 실예가 될 수 있다.   교단초기의 저축조합이나 방언역사, 혈인기도가 원불교 영육쌍전 정신의 위대한 상징이 되는 것과 같다.
기도정신과 현재 버릴 유산
원불교의 기도정신의 본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자타력을 아울르는 정신에서 본 기도의 의의이다.   타력신안은 곧 기도에 의해 표현된다 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나 기도가 타력신앙을 대표하는 중요 의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력신앙의 경향이 강한 원시불교나 선불교 유교 등에는 기도의 경향이 매우 약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민중은 자신의 허약함과 무능을 자인하였으므로 외부의 대상에 기도하는 것을 즐겼다.
불교는 본래 기도와는 먼 교단이었으나 점차 내려오면서 민심에 맞추어 기도를 수용해 왔다  따라서 신앙대상만 다를 뿐 그 하는 형식이나 내용이 바라문교와 별로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문제로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간간이 시끄럽게 이야기 되고 있으나 원불교에서는 타력신앙으로서의 기도행위의 중요성에 대해서만은 충분히 그 의미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또 한가지는 원불교는 타력신앙 행위로서의 기도를 중시하되 당처불공(사실불공)을 아울러 나가는 의미에서의 기도정신이다.   진리불공과 당처불공을 아울르는 정신이 그것이다.   대종경 불교혁신장에서는 사실불공이 주체가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런점에서 원불교의 기도 정신이나 불공 정신은 매우 진리적이며 사실적이다.   한 의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처처불상 사사불공이야말로 환자를 상대하는 그의 생활에 가장 적절한 생활지침이라 했다.   우리는 생활속에서 기도의 일념으로 일하며 사물에 접응하는가?이 명제가 원불교 기도의 중요한 부분이다.
버려야 할 유산에 대해서 말해보자.   가장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기도에 대한 몰이해 몰취미의 정신이다.   왜냐하면 기도란 우리 인류가 위기의 극복을 위하여 발명해 낸 발명품 중에서 탁월한 것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기복불교의 방향은 원불교의 본의를 이탈한 것이다.   물론 종교가 기도를 통해 복을 비는 것을 그릇된 것이라 할 수 만은 없다.   그러나 기도는 복을 내려주는 만능의 또드락 방망이가 아니므로 건전한 수행의 방향 신앙심을 강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활용되는 것이 종교에 있어 더욱 이상적인 방향이라고 본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당처불공의 측면뿐 아니라 진리불공의 의례적 측면에서도 많은 응용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 가지 기도에 대해서 부인할 것은 기도가 현실생활에 많은 활기를 줄 수 있도록 생활속의 기도를 강화하는 방향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장기간 매일 교당에서 형식적 기도를 하는 것은 일반에게 고루 권장할 만한 것은 못되고 때로는 원불교 기도의 특징을 상실케 할 수도 있다고 본다.
표어정신의 현대적 의의
표어의 정신은 전통불교의 어떤 측면에 대한 개혁일 뿐 아니라 원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원불교의 본질적 특징으로 본다.   이러한 특징적인 이념으로 인해서 원불교의 그동안의 발전이 사상적으로 뒷받침되어 왔으나 원불교의 특징적인 면을 응용하고 개발하고 구체적으로 대중화 하는데 더 많은 발전이 있었으면 싶다.   기도의 면에서나 선의 실천적 면에서 원불교의 특징이 더 잘 살아날 수 있고 응용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와 방법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주체성을 뚜렷이 하면서 그에 근거해서 개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생명력 있는 종교가 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타의 좋은 면을 적절한 만큼 수용하고 모방하는 것은 개방된 종교의 측면을 보여줄 수 도 잇는 것이지만 주객전도를 피해야 하고 주체성의 응용적 발전적 개발이 뚜렷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표어정신이야 말로 원불교의 중요한 얼이다.   일상생활 속 혹은 활동  속에서 원불교의 선이나 염불 기도 등을 여행하는 것을 낙도생활로 알고 일상생활 속에서 용심법을 길들이는 것을 진정한 종교생활로 아는 일이 급선무이다.   일평생 생활을 기도정신으로 살고 염불정신과 선의 정신 그리고 참회의 정신으로 마치면 그 속에 표어정신은 계승된 것이다.
표어정신에서는 주체성의 실현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이 되어야겠다.   영육쌍전의 면에서 한 가지 생각 키우는 일은 현 산업사회에서의 원불교의 영육쌍전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기업을 하나 성공시키는 일이 원불교의 할 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불교는 농업사회적 상업활동이 그 대부분이요 현대 상업사회에 알맞은 기업은 갖지 못했는데 이것은 무리하게가 아니라 적절한 요건이 갖추어졌을 때 이소성대로 성공시켜 영육쌍전의 정신과 능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단의 행정 제도의 개선
많은 인재들을 수용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분야에 따라서는 약간의 전문인의 확보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형사회에서는 관리의 전문화가 요청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라 해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것인데 연구의 방향에 따라서는 무리 없이 부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길이 있을 듯도 하다.   다른 하나는 인재중에서도 포교사의 경우는 앞으로의 보다 장기간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공부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줄 믿는다.   한 가지 제언하고 싶은 것은 남자포교사의 경우 약간의 초빙제를 시도해 볼 시기라 생각한다.   이는 물론 가능한 소수의 큰 교당에서 자발적으로 할 일이요 결코 강요적이 되어서는 안되겠으나 인재의 효율적인 수용을 위해서 시도해 볼 문제라 생각한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총부는 자체의 경비를 확보하고 지나치게 지방 교당에 의존하지 않는 체제가 되어야 지방 교화의 활성화가 이루어 질 것이라 본다.   물론 단시일에 될 문제는 아니다.   교단의 중요결정이 이상과 현실이 더욱 조화를 이룬 만족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중지가 모여야 되리라 본다.   젊은 층 신진으로 더 깊은 예기를 나눌 수 없어 유감이나 예를 들면 혹은 공도자 숭배의 행위로서 세계 공도자와 한국 공도자의 박물관을 작은 규모로나마 서울기념과 기타에 장치하여 보관했으면 싶다.   그것은 교화에도 크게 도움되리라 본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나는게 있는데 영모원의 키가 작은 제불제성 위패는 희사위 위패와 상징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모시게 하여 본의를 더욱 잘 살리는 것이 좋겠다.   구체적인 다른 문제는 여기서는 다 다룰 수 없겠다.   끝으로 부언하고 싶은 것은 근래 보화당의 지점의 계속적 증설과 지방교당의 어린이집의 개설, 신협, 마을금고, 이리 자선원의 설립, 대구 동명훈련원, 서울기념관의 설립 등 근래 교당의 밝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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